만약, 그들은 이 단어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만약 윤혜의 아버지가 진범이 아니라면, 재광은 윤혜에게 그쪽과 연애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강 목수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됐다는 소식에 윤혜도 그 ‘만약’을 그저 바람이 아닌 사실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들은 처음으로 ‘만남’을 약속했고, 윤혜는 오랫동안 망설였던 귀걸이를 하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거리낌 없이 거리를 나섰다. 그러나 유행이 한참 지나 보이는 구두를 신은 윤혜의 발은 어쩐지 더 수줍고, 한편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남들처럼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고를 할 생각에 부푼 모습이 처음인 윤혜의 얼굴은 밝고 아름다웠다.
비로소 윤혜의 얼굴이 참 하얗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창백하고, 쓸쓸함 때문에 몰랐던 순백의 피부다. 윤혜는 극장 앞에서 재광에게 어제 들었던 말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나도 연애하고 싶어요. 그쪽이랑” 참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재광은 웃을 수 없다. 데이트를 약속했던 어젯밤과 달리 다시 강 목수가 무혐의로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혜의 행복을 반나절이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재광의 바람을 깬 것은 7년 만에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였다. 절반 이상은 아버지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 믿고 있는 윤혜에게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7년 동안 꿈 꿔왔던 평범한 보통의 연애는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아니 아버지와의 통화는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재광에게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거듭 묻지만 윤혜도 안다. 다만 모르고 싶을 뿐이다. 이제는 그 만약마저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쉽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강 목수도 범인은 아니었다. 재광은 그 사실을 알고 낙담한다. 재광은 윤혜 때문에라도 강 목수가 범인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 낙담말고도 재광을 당황케 한 사실이 있다. 사실은 형의 연인은 여주인이 아니라 강 목수였던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엄마 신 여사가 여주인에게 강력하게 함구할 것을 강요했던 것뿐이다.
여기서 다르면서도 같은 두 엄마의 모습이 겹쳐진다. 김주평의 엄마는 7년 째 밥을 이불 속에 묻어둔다. 아들이 돌아오면 내놓을 생각이지만, 이 엄마에게는 아들이 범인이고 아니고의 문제보다 그저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재광의 엄마에게는 김주평이 범인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엄마 신여사는 지나칠 정도로 김주평에 대한 적개심은 자신이 원죄를 숨기고, 죽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김주평을 용서하게 되면 신 여사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재광이 윤혜와 가까워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엄마는 재광까지도 자신의 분노 속에 억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결말을 앞둔 보통의 연애는 두 가지 갈래에 서있다. 그 결정권은 재광 엄마에게 있다. 윤혜와 재광이 꿈꾸던 보통 연애는 엄마의 다각적인 용서에 달려있다. 그것은 아주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것처럼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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