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일에는 그 목적을 표장하기 위한 명분이 있고 정당화를 위한 근거가 있는 법입니다. 서로가 대립하는 가치나 이익을 추구하거나, 누군가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격돌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의 대립과 정당화는 더욱 더 격렬하게 부딪치기 마련이구요. 승부의 성패는 누가 더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여 눌러 이기느냐, 결국 누가 더 쎄냐라는 단순한 우열 따지기로 결정되는 것이 대부분이라 해도, 명분과 정당화의 격돌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거든요. 의미 없는 승리는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또 다른 반발로 인해 뒤집히기 일쑤니까요.

MBC의 파업이 예상했던 대로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사태 수습이나 해결의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각종 징계를 통한 사측의 압박과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고강도의 탄압이 이어지고 있죠. 그와 동시에 이번 저항의 움직임은 KBS와 YTN, 연합뉴스로까지 전선이 확대되고 있어 이 문제는 현정부가 언론을 권력의 도구로서 사용하고자 했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한, 그리고 방송사와 언론이 본래의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위치를 되찾고자 하는 광범위한 저항 운동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많이 벌고 많이 얻어내기 위해 사측과 대립하는 밥그릇 싸움이 아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가치의 문제, 존재의 싸움이 된 것이죠.

이 저항의 대오엔 지위여하가 없습니다. 저항의 시발점이었던 보도국의 사람들에서부터, 국장급의 고위층은 물론이고, 회사의 간판이었던 아나운서들, 제작의 핵심인 PD들을 위시한 작가진과 촬영 스텝들까지 MBC를 구성하는 중추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죠. 이들이 비운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서 별의별 재방송과 특집 방송들이 전파를 타고 있고, 방송 화면의 하단에는 황급한 구인광고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야말로 비상시국, 지금의 MBC는 겨우겨우 방송 내용을 메우고 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결국 현재 MBC가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히트작 ‘해를 품은 달’까지 이번 파업 대열에 동참을 선언했습니다. 시청률 40%를 넘나드는 드라마가 작품 외적인 문제로 결방되는 초유의 사태. 작품의 선장인 김도훈 PD의 파업 동참 선언으로 종영을 불과 2회분을 남긴 상태에서 촬영 중단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죠. 당장 이번 주 방송분은 스페셜 편성이라는 꼼수로 어떻게 넘어간다고 예고했지만, 파업의 장기화가 뻔한 지금의 상황에서 이 작품의 결말이 언제 방송을 탈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훤과 연우 두 사람의 사랑의 결착은 양명의 결단이나 영의정의 반란, 혹은 바른 정치를 향한 훤의 확고한 의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 MBC 사장님의 결정에 달린 문제가 되어 버렸어요.

그동안 파업에 맞서는 자신의 정당성과 명분으로 해품달의 인기, 무한도전이나 나는 가수다의 선전을 내세웠던 사장님의 명분에 뒤통수를 때린 파업 동참 결정이었습니다. 무한도전은 홍철과 하하의 대결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김태호 PD의 파업 참가 동영상을 보고 있고, 김영희 PD의 복귀로 시즌2을 예고했던 나가수는 이젠 화제에서도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품달을 비롯한 드라마들까지 휴업을 선언한 지금 더 이상 사장님이 자신의 덕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지 않아요. 이들 프로그램의 인기와 시청자들의 성원은 결코 사장님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며 그들이 직접 항변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물론 이러한 격렬한 저항과 올바른 요구에도 불구하고 MBC를 비롯한 방송언론 바로세우기라는 목표의 달성은 여전히 긴 시간과 인내, 고통을 감내한다 해도 이루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또 다시 좌절하고 원상태로 돌아가는 아픔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갈망해야 하는 것은 해품달의 결말이 아닌, MBC의 해피엔딩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결승점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의 급작스러운 결방은 아쉬울 따름이지만, 보다 큰 목표와 명분을 위해 시청률도 포기한 이들의 파업을 격렬하게 지지합니다. 사장님의 얼얼해진 뒤통수는, 시청자들의 거센 분노와 저항 때문에 더욱 더 쌔게 얻어맞게 될 거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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