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뉴스를 통해 보는 세계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기괴하다. 끊이지 않는 존속 범죄,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사건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범죄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약자이다. 노인이거나 딸이거나 여성이다.

지난해 여름, 꽃다운 나이 스물다섯 살로 생을 마감한 황예진 씨 사건이 보도되었다. 놀랍고 슬픈 일이었다. 교제중이던 남자와 다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남자가 황예진 씨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보도였다.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했을 때 처음엔 놀랐고 다음에 분노했다. 앵커의 설명이 없었다면 연인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차례 벽에 밀치고, 쓰러져 의식이 없는 황예진 씨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남자의 모습은 연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황예진 씨의 죽음은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사망 사고로 보도되었다.

[단독] 서 있지 못할 만큼 맞았다…"살인입니다"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데이트’와 ‘폭력’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데이트’는 낭만적이고 설레는 감정이 담긴 단어다. 그에 비해 ‘폭력’은 위협적이며 공격적이고, 강제적이며 공포감이 담긴 단어다. 데이트는 적어도 호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두근거리는 만남이다. 그래서 물리적인 강제성과 위협적인 공격성이 있는 폭력이 ‘데이트’란 단어와 결합하면 연인 간의 사소한 다툼 정도로 축소되고 가벼운 사건 또는 우발적 사건 정도로 치부된다. 이에 시민사회에서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이트 폭력'이 아닌, '교제 폭력' 그리고 '교제 살인'으로 바꿔 써야 한다고 말한다.

이십 년 전에 일이다. 다니던 병원이 쉬는 날이라 문을 연 병원을 찾다 보니 멀리 대학가에 있는 병원에 가게 되었다. 진료를 받고 약을 짓기 위해 근처 약국을 들렀다. 약에 관해 설명해주던 약사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가리키는 곳은 약국 옆의 골목이었다. 골목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었다. 싸우고 있었는데 연인으로 보였다. 다투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느닷없이 남자가 여자를 사정없이 발로,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도 맞서 보려고 주먹을 뻗었지만, 힘의 차이가 났다. 남자의 힘에 압도되어 일방적으로 맞았다. 남자는 여자 배만 집중적으로 가격했다. 여자가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놀라 신고하자고 했다. 약사는 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신고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일 많아요. 대학가잖아요. 저러다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가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약사의 말과는 달리 상황은 위급해 보였다. 약사가 신고하지 않겠다면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했더니 -내가 휴대전화기가 없었다- 탁자에 있는 전화기를 끌어다 옆으로 밀어놓고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신고하고 싶으면 내 휴대전화기로 하든지 다른 방법으로 하라고 했다.

약사는 사랑하는 남녀 간의 사소한 다툼이고 사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학교 앞에서 장사하는 처지로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은 게 이해되는 면도 있었지만, 약사의 태도에 화가 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공중전화를 찾아 헤맸고 겨우 찾은 공중전화는 고장나 사용할 수 없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맞던 골목으로 다시 뛰어왔을 때는 이미 둘 다 사라진 후였다. 혹시 하는 마음에 골목을 뛰어다녔는데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약사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처음 보는 사건으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여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여자가 걱정되어 한동안 그 골목을 기웃거렸다.

교제 폭력은 신고가 중요하다. 사적인 일로 생각하여 모른 척하거나 남녀 사이의 애정 문제로 치부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피해자는 대부분 여자이며 육체적 폭력 앞에서 여자는 일방적인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황예진 씨 폭행 사망’ 30대 1심서 징역 7년 (KBS 뉴스9 보도화면 갈무리)

1월 6일. 황예진 씨를 폭행 살해한 남성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지속해서 폭행하는 관계가 아니었고, 감정충돌 중 우발적으로 폭행하면서 상해치사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이며 교제 살인 내지 폭행 살인의 일반적 유형으로서 살인에 이르는 경우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살해 의도가 없었다고 하여도 황예진 씨는 죽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삶이 무참히 부서졌다. 가해자는 예진 씨가 직장을 다니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이 들어갈 기회를 빼앗았다. 또 부모와 친구는 예진 씨와 일상을 함께 나누며 웃고, 울고, 즐기고, 행복해하며 나이 드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 모든 것을 앗아간 사람에게 내려진 형벌이 고작 징역 7년이다. 가해자는 형을 다 살고 나와도 삼십 대이다. 불공평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커피 알갱이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쓰다.

김은희,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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