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랑이다. 비교적 크고 유명한 도시지만 사람들 일은 마치 작은 두메산골 일들처럼 다 알고 지내는 곳. 이런 곳에서 대체로 젊은이들은 숨이 좀 막힌다. 별 거 아닌 일이라도 금세 소문이 나고 또 자기 귀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도시에 사는 여자라면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갓 다린 하얀 블라우스 깃처럼 정갈하고 또 순결한 느낌의 여자 윤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창백한 얼굴빛을 드리우고 있다. 윤혜는 전주 관광안내소에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살인용의자로 7년째 지명수배 중이다. 윤혜의 할머니는 아들의 죄(?) 때문에 동네사람들에게 면구스러워 누가 시키지도 않고, 또 해도 칭찬도 않는 일들을 하는 것이 소일거리이다. 예컨대 미끄러운 언덕길에 흙을 퍼와 뿌린다든가, 동네 쓰레기장을 정리한다든가 등이다.

사건이 있고 다짜고짜 물에 뛰어들 정도로 예민한 사춘기에 맞은 아빠의 일은 여자 윤혜를 아주 오랫동안 괴롭히고 있다. 계약직으로 일하는 안내소도 소장이 바뀌면서 갑자기 그만두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윗사람이 마음대로 정한 마지막 근무일에 서울서 근사하게 생긴 사진작가가 재광이 찾아온다.

윤혜는 이 남자에게 평소 하던 투로 대단히 차갑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자기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외지 남자에게 윤혜는 오랜 방어기제가 해소되고 있었다. 온갖 차가운 시선과 불평등한 처우에 지친 윤혜는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자유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재광은 윤혜 아버지가 죽인 사람의 동생이다. 윤혜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재광 역시 형을 잃고 세상을 반쯤 등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젊은이다. 7년이 지나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건이니 직접 용의자의 가족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 방문이 무엇이 될지는 본인도 몰랐다.

그날 밤, 윤혜의 집밖을 어성거리다가 우연히 윤혜와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사람이 그리운 할머니의 강권에 떠밀려 집안으로 들어왔다가 7년 넘게 창문을 막고 있는 판자를 떼어내게 된다. 재광의 그런 행동은 곧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참 아름답고 상징적인 복선이었다.

누구에겐가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마땅할 20대의 윤혜는 이런 일이 처음이다. 리트머스지에 색깔이 번지듯이 재광에게 끌리게 된다. 재광이 돌아가고 윤혜는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귀걸이를 꺼내 귀에 대보고는 실소를 하게 된다. 아마도 ‘내 주제에 무슨 사랑...’ 정도의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다음날 아침 정혜는 잊고 살았던 아침햇살의 간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뜬다. 이 새삼스러운 아침에 윤혜는 창문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활기차게 밀려드는 햇살을 바라본다. 이번에는 어젯밤과 달리 행복하다는 미소를 짓는다. 온다던 점심시간은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다시 마주친 재광이 가자고 한 곳은 윤혜에게는 너무도 두려운 살인현장이 있는 산.

위에서는 그만두라고 성화지만 윤혜는 하는 일은 똑바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억누르며 재광과 함께 산을 오르지만 현장에 가까워지면서 그만 발을 삐고 만다. 결국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다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혜는 재광에게 뜬금없이 오늘 올라가냐고 묻는다. 그런다고 하자, 윤혜는 얼굴을 돌린 채 “그럼, 오늘 나랑 잘래요?”한다.

예고에도 수차례 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깜짝 놀라게 한 대사였다. 그 말에 놀란 재광은 도로 가드레일을 들이박게 된다. 윤혜는 왜 아니 어떻게 낯선 남자에게 자자고 할 수 있었을까? 60년대 섬마을 소녀도 아니고 낯선 서울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얘기에 깊이 빠질 수는 없었다. 잠시 후 윤혜는 게시판의 지명수배전단을 가리키며 “우리 아빠에요”하게 됐다. 재광도 답한다. “아는데, 죽은 이 사람 우리 형이거든”

윤혜도 다시 놀란다. 아니 절망한다. 이 남자에게 자자고 했을 때의 마음, 자기 아빠를 밝힐 때의 마음과 정반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기에, 떠날 사람이기에 가까워지고 싶었던 윤혜에게 이만한 절망은 또 없을 것이다.

보통의 연애는 흔해빠진 연애드라마가 아니다. 드라마 스페셜답게 정말 특별한 연애를 가져왔다. 재벌과 신데렐라 사랑놀이에 빠진 그 식상함에서 벗어난 것만도 좋은데, 여자 주인공이 시 같은 여자 유다인이라는 것도 정말 좋아 죽겠다. 또한 오작교에서 이름을 알린 연우진도 연기의 선이 굵어 신인답지 않아 아주 잘 어울린다.

보통의 연애는 단지 반어적일 뿐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아무리 보통이 아닌 연애라도 이 연애는 너무 특별하다. 특히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실종된 투명한 감성이 눈부시다. 남자라고 빠질 법한 멜로드라마다. 선정적인 요소 없이도 그 충분한 감성만으로도 가슴을 자극해 뜨겁게 만든다.

다만, 4부작은 너무 짧다. 이 기막힌 인연을 풀어내자면 적어도 8부작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단막극답게 간결하고 깔끔해 좋지만 4부작에 다 담지 못할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아쉽기만 하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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