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하다. 어색함을 넘어서, 그냥 발연기라고 치부하는 미숙함 그 이상의 묘한 이질감. 문제의 그녀, 한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해를 품은 달에서 그녀가 연우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느꼈던 감정은 이런 동떨어짐이었습니다. 성인 연기자들로 전환되며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배우들 중에서 유독 그녀만이 도드라지는 느낌이 전달되는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이전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저는 그녀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처음에는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캐스팅 단계에서부터 수군거리며 걱정했던 나이 차이 때문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녀가 함께 연기해야 할 김수현과 정일우와 어울리기에는 경력으로 보나, 함께했던 상대 연기자들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억으로 보나 이모와 조카 관계로 끝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제법 잘 어울리는 극강 동안 비주얼로 김수현과 부담 없는 투샷을 소화하고 있고, 다른 것은 몰라도 외모 때문에 지적이나 비판을 받는 일은 아직 없습니다. 외형적으론 이런 부조화를 설명하기 힘들어요.

그렇다면 이런 주위와 어우러지지 못하는 어색함은 기억을 잃고 무녀로 성장한 연우의 캐릭터 때문일까요? 확실히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기품과 아우라는 원작과 드라마 모두에서 연우의 존재감을 뽐내는 주요한 요소입니다. 아녀자이건 무녀이건 사대부가 아니라면 무시받기 쉬운 편견을 보기 좋게 극복해내는 학식과 현명함이 연우가 가진 최고의 매력이었으니까요. 신분이 어떠하건 간에 주위를 제압하는 명민함이 무녀로서의 신비스러움과 함께 겹쳐지면서 이런 이질감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불편함은 이런 유의 묘한 매력이 아니었어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 이번 11화를 보며 드디어 그 해답을 어느 정도 찾은 것만 같습니다. 연우를 소화하는 한가인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던 거죠. 그녀가 사람 취급도 못 받는 한낱 부적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치며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며 살아왔기 때문도 아닌 것처럼 보여요. 그냥 한가인의 연우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감정의 일부분이 아예 제거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가인은 다양한 감정들을 전혀 표현하지 못하고 있어요. 언제나 같은 톤, 같은 표정,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보여주고, 살아갑니다. 사람도 부적도 아닌 그냥 예쁜 인형 같아요.

김수현과 비교한다면 어떨까요. 아니 양명을 연기하는 정일우는 또 어떨까요. 이 두 젊은 연기자들은 60여 분의 시간동안 자신들의 희로애락을 다채롭게 보여주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상황을 비꼬며 신하들의 속내를 비웃기도 하고, 냉정하게 현실을 판단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절망적인 현실에 분노하거나 오열합니다. 짐짓 짓궂은 농담을 건네며 웃음 짓고, 따스하게 정인을 바라보며 애정을 표시기도 하죠. 이 두 남자들뿐만 아닙니다. 무표정으로 일관해야 하는 운검을 제외하면 대왕대비도, 중전도, 공주, 무녀, 신하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이 강렬하게 감정을 표출하고 충돌하며 마음을 쏟아 냅니다. 이들이 귀하고 천한 구분이 있다 해도 모두가 사람의 얼굴로 웃고 울고 화내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연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해품달에서 그녀가 격렬한 감정기복을 보인 적이 있었을까요? 물론 울기도 합니다. 정색을 하며 따질 때도, 단호한 결의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 화를 내기도 하고, 과감하게 나서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정의 기복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동일한 진폭에서만 오갈 뿐입니다. 언제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감정 없는 대사만을 그대로 재생하는 것이 전부이죠. 그녀는 부적이기 때문에, 아니면 무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사람처럼 느껴지지가 않아요.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야만 하는 무녀의 삶을 토로할 때에도, 잔실이의 출궁을 말릴 때나 스스로 궁을 나가겠다고 말할 때에도, 형판에게 대들며 정당함을 주장할 때에도, 돈이 없어 곤란해 하는 휜을 보며 웃으며 돈을 건넬 때에도, 심지어 훤의 그 가슴 떨리는 사랑고백을 받을 때에도 한가인의 연우는 늘상 가라앉아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이질감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전 평범하게 웃고 우는 것도 하지 못하는, 정상적인 사람 같지 않은 연우가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입니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요.

배우로서 한가인의 치명적인 약점이 확연하게 들통 나고 있는 것이죠.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부녀의 위치도, 이전에 소화했던 극에서의 기억이나 CF스타로서의 이미지 소비도, 생소한 사극의 첫 도전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녀의 한정된 표정, 동일한 대사처리, 확실하지 못한 감정 표현이 가장 큰 장벽이었단 것이죠. 모두가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마치 왕따처럼 그저 혼자 조근조근하고 침착하기만 한 그녀의 일관된 캐릭터 표현은 생기발랄하면서도 총기가 넘치던 연우를 그냥 예쁘기만 한 박제로 만들어 버렸어요.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연우는 지금보다 훨씬 더 활기차도, 약간은 짓궂어도, 조금은 더 과장되어도 좋습니다. 적어도 약간은 더 오버스럽다고 해도 지금의 딱딱한 연우보다는 더 사람답고 매력적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이 계속된다면, 과연 전 왜 김수현이 그녀에게 매혹되는지 납득할 수 없을 거예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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