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계셨나요? 아직도 종편 프로그램들이 제작되고 방송되고 있습니다. 두 달이 넘은 지금 대부분의 언론들로부터 별다른 관심도, 시청자들에게 호응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꾸역꾸역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고 나름의 시도를 하고 있죠. 출연자들의 면면만 본다면 공중파 프로그램들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다루는 소재도 나쁘지 않은 것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런 그럴싸한 포장에 비해 별다른 알맹이를 찾아볼 것들이 없기 때문이죠. 마치 엄청나게 화려하다고 포장은 해두었지만 결코 그 안에서 직접 살 수는 없는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는 기분이에요.

창립기념 드라마라는 거창한 구호와 함께 (뭐 사실상 모든 프로그램이 다 ‘창립기념’이기는 합니다만) TV조선의 야심작, 한반도가 드디어 처음으로 전파를 탔습니다.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채널로 몰려들고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는 이른바 킬러 콘텐츠가 될 것임을 기대하며 이래저래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정성을 기울인 결과물이었죠. 100억의 제작비, 황정민과 김정은을 위시한 막강한 출연진, 한반도의 남북 대치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애절한 사랑이야기. 각 소재들만 본다면 관심이 쏠릴만한 이유가 많았습니다. 이른바 소문난 잔치였던 셈이죠.

방송사의(아주 너그럽게 이 채널을 정상적인 방송사라고 인정해 준다면) 지원 역시도 막강했습니다. 자회사인 조선일보는 물론이고 여러 인터넷 신문에서도 나름 애를 쓰며 홍보 자료에 근거한 기사들을 쏟아냈었습니다. 방송 당일에는 대한민국의 정통 보수언론을 자처하며 올바른 보도야말로 진정한 자신들의 임무이자 가치라고 웅변하던 이들이 뉴스 시간까지 바꾸어 가면서 이 프로그램에게 유리한 시간대를 잡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방송 이후에도 각 포털 사이트에선 실시간 검색어의 상위권에 오르내렸고요. 그래서 결과는 어땠냐고요? 무려 종편 동시간대 1위. 시청률 1% 중반이라는 대박 시청률을 올렸습니다. 100억대 드라마의 아주 깔끔한 출발이었죠.

비꼼이 너무 심했나요? 많은 이들이 예고했지만 대재앙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케이블 기준으로 1% 시청률은 대박이라고 하지만 이런 시청률로 100억대의 기존 공중파 방송국도 힘겨워할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짧은 미니시리즈도 아닌, 2012년 상반기를 이끌어 갈 24회를 예고하고 있는 이 드라마에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에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뭐 TV조선은 그러고 싶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광고주들이 넓은 아량으로 선심성 수주를 해줄까요?

갈수록 나아지리라,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작품의 완성도가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올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회를 보고 난 뒤에 느낀 감정은 그간 대부분의 종편의 프로그램에서 느꼈던 헐거움, 진부함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작비를 짐작할 수 있는 볼거리는 적지 않았고, 배우들의 면면도 굉장했지만 작품 속 인물들의 캐릭터는 너무나 뻔했고,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지의 여부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예측 가능하더군요. 그냥 이런 배경으로 만들어진, 쉬리 이후에 여러 번 반복되었던 남남북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의 또 다른 복사본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러니 이제 문제는 작품의 전면에 나선 배우들에게 남았습니다. 황정민과 김정은이란, 혹은 이순재, 김영철 같은 좋은 배우들이 이런 무관심 드라마에게 발목이 잡혀 2012년을 날려버릴 위험에 직면했으니까요. 물론 고작해야 4회로 종영을 예고하고 있는 다른 종편 프로그램 더듀엣처럼 끝까지 24회를 채울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설혹 끝까지 마무리를 다 한다고 해도 대형 드라마를 완주시키지 못한 책임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100억대 제작비가 들어간 시청률 1% 드라마의 주연이란 꼬리표는 결코 자랑스러울 것 같지 않아요.

가능성이 매우 적기는 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어떨까요? 2%대를 넘지 못한 종편의 굴욕을 극복하고 무려 4~5%대의 시청률을 안착시킨다면 이런 멍에가 조금은 가벼워질까요. 아니 이왕이면 10%의 전설로 남는다면 종편의 험난한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 그야말로 개국공신과도 같은 위대한 배우로 찬사를 받게 될까요? 천만에요. 만의 하나 그런 성공이 가능하다고 이들은 태생적으로 잘못된 시작이었던 종편에게 인공호흡기를 달아준 악역으로 또 다른 형태의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성공을 해도 문제라는 것이죠.

이들로서는 잘해도 비난을 못하면 굴욕을 얻는, 피할 수 없는 배우인생 최악의 패를 선택한 셈입니다. 그저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대중의 외면과 비난을 각오한 뒤에 남는 것은 최소한의 개념도 없는 영혼 없는 배우라는 주홍글씨와 특정 언론사 사장님의 총애뿐입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한심스러움과 실망을 넘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시청자들은 빠르게 잊고 쉽게 용서해 준다지만 이런 대중의 너그러움만을 의지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은 조금 심각해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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