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한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유력한 우승 후보의 리듬을 조절해주는 페이스메이커가 있는 마라톤과 마찬가지로 적어도 두 달이상의 시간동안 한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장기 레이스에서도 호흡 조절은 필요합니다. 줄기차게 달리기만 하면서 자신의 속도를 따라오라고 다그치면 금세 여력을 다해 완주하지 못하는 마라톤처럼, 드라마에서도 생각을 정리하거나 내용을 이어붙이기 위한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죠. 정신없이 휘몰아치다가도 조금은 멈추어 서서 그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운 문제들을 출발시키는 강약 중간 약의 적절한 배치가 긴장을 더욱 더 배가시키고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강하게 유인할 수 있단 거죠.

그런데 이런 긴장의 이완과 숨고르기의 목적이 내용의 원활한 전달과 전체 구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도리어 싫증과 지겨움을 불러오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시원하게 쭉쭉 뻗어나가던 내용 전개가 갑자기 힘을 잃어버리거나, 지루한 장면과 상황이 반복되거나 한다면 이런 식의 속도 늦추기의 의도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는 것이 당연하거든요. 인기 드라마라면 언제나 직면하게 되는 문제. 촬영 분량 부족과 연장 방송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의혹이 그것입니다.

수목드라마는 물론, 현재 방영되고 있는 모든 드라마 중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해를 품은 달의 현 상황은 이 작품이 누리고 있는 인기와는 정 반대의 절박함 투성이입니다. 아역과 함께 시작했던 촬영 분은 매우 빠르게 소진되었고, 성인 연기자로 전환한 이후에 이미 촬영과 편집을 위한 충분한 준비와 여유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촉박한 일정에 쫒기고 있습니다. 배우들의 인터뷰에는 벌써부터 고작해야 하루 1~2시간인 수면 부족에 의한 고통이 묻어나고 있고, 매 회가 끝날 때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준비 부족에 의한 옥에 티에 대한 지적이 끊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정신없이 찍고 내보내고 있단 거죠.

이런 전쟁 같은 촬영 현장은 MBC의 오락가락하는 요구 때문에 더더욱 극의 완성도를 저해하고 있습니다. 파업으로 인한 방송 편성의 파행으로 인한 시청자들의 불만을 느닷없는 해품달 80분 연장 예고로 무마하려는 꼼수 때문에 더욱 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2012/01/26 - 해품달의 사라진 20분, 시청자 화나게 한 거짓말) 80분은커녕 오히려 평소보다 더 빨리 끝난 것 같이 겨우 분량을 맞춘 방송이었으니 의도하지 않게 시청자들에게 낚시를 한 셈이었으니까요. 지금 해품달은 회사의 절박한 요구도 들어 줄 수 없을 만큼 마감에 쫒기고 있다는 반증이었죠.

하지만 이런 현장의 피로도는 모른척하면서 해품달의 인기에 취한 MBC는 벌써부터 연장 방송 이야기를 솔솔 풍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졌던 MBC 수목 드라마의 절망적인 스코어를 반등시킨 해품달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꼼수입니다. 이미 광고도 완판 되었다고 하고, 모든 언론의 관심이 해품달에게 쏠리고 있는 상황이니, 이미 생방송처럼 진행되고 있는 촬영 여건은 모른 척 한 채 이를 기회로 돈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겠다는 작품의 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탐욕스러운 기획이죠.

이런 절박함은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휜과 연우의 재회가 전달해주어야 하는 설렘, 연우가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 시간을 뛰어넘은 등장인물들의 관계 재정립 등등의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은 지금의 상황이지만 이번 주의 해품달은 느긋하기만 했거든요. 평소에는 종영 직전의 드라마에서나 반복되었던 과거 회상 장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서로간의 거리, 답답하기만 한 이야기 전개 속도는 그동안 기세 좋게 속도를 내던 극의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렸습니다. 이런 호흡조절이 과연 숨을 고르기 위한 잠시 멈춤이었을까요?

그냥 촬영이 방송 분량을 점점 더 따라잡기 힘들어지고, 그 와중에 연장에 대한 압박이 슬슬 풍겨오고 있으니 벌써부터 내용 늘리기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더군요. 언제 끝나는지 시계를 보며 초초해하던 압박이 확연하게 사라진 지루함. 혹은 반복하기가 시작되었던 방송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인기는 끌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매혹되어 버린 시청자들이 대다수이고 해품달을 능가하기엔 경쟁자들의 힘이 현저하게 떨어지니까요. 하지만 이런 식의 꼼수는 이 드라마를 아끼고 사랑해준, 일주일을 수목 저녁을 기다리는 낙으로 버텨온 시청자들을 배신하는 짓입니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해품달은 준비 부족으로 황급하게 분량만 때운 돌림노래고, 내용만 쭉쭉 늘어뜨린 밋밋한 연장방송이 아닌 처음 우리에게 주었던 감동과 긴장의 해품달입니다. 이렇게 여유와 배짱을 부리기엔 해품달은 이제 고작 9회가 방송되었을 뿐입니다. 인기를 얻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잘나가던 드라마들이 망가질 때 뿜어져 나왔던 배신감처럼, 드라마를 향했던 시청자들의 사랑은 분노와 불만으로 돌아올거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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