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품은 달의 연우는 세자빈에서 액받이 무녀로 팔자가 뒤바뀌었다. 연우의 롤러코스터 타는 팔자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액받이 하러 갔다가 마치 승은이라도 입을 것만 같은 야릇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헌데, 액받이 무녀라는 것이 진짜 실재했을까?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도 없이 해를 품은 달 앞에 붙은 퓨전이란 단어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하기는 그렇다. 허구를 근간으로 하는 드라마에 자꾸 사실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별 의미도 없거니와 반문화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게다가 고증사극도 아닌데 시시콜콜히 따질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해를 품은 달이 짧은 시간에 올해 최초로 시청률 30%를 뚫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것이 문제다. 드라마에 몰입할수록 허구를 사실로 믿어버리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구와 사실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무속에 관련된 내용들은 가뜩이나 부족한 역사교육에서도 가르치지 않는 부분이기에 괜한 오해와 편견을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 외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액받이라는 말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비슷한 말로 액막이는 존재한다. 액막이는 제도종교와 재래종교 가릴 것 없이 제의적 행위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해를 품은 달에서도 액막이 행사를 보여주었다. 어린 훤이 처용탈을 쓰고 어린 연우를 데리고 가 고백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의 행사가 바로 액막이 행사로 나례회라고 한다. 왕까지 참여할 정도로 중요한 행사인 나례는 궁궐과 민가 모두 치룬 행사로 잡귀를 쫓아내고자 나례도감, 관상감 등에서 주관했다.

해품달의 나례회에서 세자 훤이 썼던 탈이 처용탈이며, 처용무는 현재도 중요무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지만 이미 ‘서라벌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신라의 처용가로 더 익숙한 이름이다. 처용은 귀신을 쫓아내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헌데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전통에는 설, 추석 등의 명절과 함께 24절기가 있다. 요즘은 거의 지켜지지 않지만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전통시대에 절기는 여러 가지 의미로 잘 지켜졌지만 그 안에 어쩌면 가장 큰 것이 바로 액막이다. 과학과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자연재해나 질병에 대해 취약했던 조상들은 모든 재앙과 질병을 주술적으로 막아보고자 다양한 액막이 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24절기의 수많은 액막이 행사들 속에서도 액받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무속 행위에 간혹 잔혹한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산 사람을 제물(액받이)로 쓴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굿에 산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도축법 때문에 무당들도 거의 하지 않지만 <군웅거리>라는 과장이 있다. 군웅거리에서는 소나 돼지를 신께 바치는데, 이때 산 짐승을 바로 잡는 것을 산 타살이라고 해서 죽은 짐승을 바치는 죽은(익은) 타살과 구분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사라지고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잔인하기도 하지만 민간의 도축이 금지된 탓에 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살상이 액받이의 의미는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존재하는 일종의 희생양 개념일 뿐이다. 흔한 속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말이 있다. 굿의 제의적 절차가 끝나면 곧바로 마을축제가 된다. 굿에 사용됐던 모든 음식을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나눠먹었던 것이다. 그것은 고기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결국 신께 바치는 모습이지만 기실 인간을 위한 잔치인데, 그 음식에 액이 담겼다면 말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액막이, 액받이를 따지기 전에 먼저 액이란 말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액(厄)이란 단어는 기슭 엄(厂)엄 자와 병부 절(卩,㔾)이 합쳐진 것이다. 엄 자는 벼랑, 언덕 등의 의미가 있으며, 병부 절은 어원을 따라가면 꿇어앉은 사람이란 뜻이다. 결국 액이란 문자가 만들어진 원리에 따라 해석을 하자면 벼랑으로 떨어진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 재앙인 것이다. 그러니까 액막이는 이런 재앙을 막는 행위인데 다른 말로 벽사(辟邪)란 말이 있다. 귀신을 쫓아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재앙을 미리 막거나 쫓아내는 것은 있어도 재앙을 다른 사람에게도 옮긴다는 개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액받이라는 개념은 주술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액받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원작자를 상상력에 먼저 놀라게 된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도 상상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린 연우를 앓게 한 흑주술은 존재하는 개념(저주)이지만 액받이는 작가의 창작물이다. 아마도 고스트 바스트처럼 악령을 특정한 용기에 가둔다는 개념에서 발전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지만 어떤 것에 기인했든지 간에 액받이란 단계로 발전시킨 상상력이 놀라울 뿐이다. 연우와 훤을 만나게 하기 위한 고심이 얼마나 컸나를 짐작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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