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의 장례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비록 요절했다 하더라도 세자빈의 첩지를 받았다면 국혼을 치렀겠지만 국혼 전에 출궁당한지라 사가의 법도대로 간소한 장례절차를 따른 점은 아쉽지만 어쩔 도리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이지만 아버지 허영재는 딸의 무덤에 작은 비석 하나 갖춰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천만다행인 것이 도무녀 장 씨의 약이 사람의 목숨을 일시적으로 끊었다 살아나게 하는 것이라 만일 삼일장이라도 치렀다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매장을 마친 연우의 무덤은 그날 밤 장 씨에 의해서 파헤쳐졌다. 당연히 숨이 돌아올 연우를 구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헌데 깨어난 연우에게 큰일이 벌어졌다. 기억을 잃은 것이다. 그런 연우를 보는 장 씨도 다소 놀라는 반응이었는데, 이는 원작과 다른 전개라고 한다. 원작에서는 왕을 보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연우의 사무치는 마음을 애절하게 그렸다면 기억상실이 찾아온 것은 그 애절함을 기대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변화임에 틀림없다.

약의 정체를 알고도 마신 연우의 심성이 주는 힌트

연우의 기억상실에 대해서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먼저 기억상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정도 숨이 끊어졌다 깨어났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적인 기억장애가 올 수는 있다. 그러나 아비가 먹여주는 약이 자기를 숨지게 할 것임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 마신 연우의 심성이라면 자신의 존재가 가문에 미칠 영향을 저어해 짐짓 기억을 잃은 척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연우가 약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장 씨가 말한 신병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무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바에는 가문에 해가 되지 않아야 하기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효녀인 것이다. 신병이 있어 무녀가 된다면 일국의 국모 자리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자기를 희생시켜 가문과 나라를 지키려는 갸륵한 마음이라면 어차피 다시 찾을 수 없는 가족과 세자이기에 차라리 기억을 잃은 채 하고자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상실이라 설명되는 무녀수업

한편으로는 기억상실이 다행인 점들도 존재한다. 죽기 전의 기억을 하고 있다면 한양을 떠나 무녀로서의 수업을 받아야 하는 연우의 입장이 여러모로 복잡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출궁한 상태지만 세자빈에 간택된 사람이 버젓이 살아있으면서 무녀를 따라 무속수업을 따라나선다는 것을 설명키는 어렵다.

개연성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연우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에는 무녀의 운명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연우가 죽었다 살았다고 해서 운명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도 반응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현재로서는 연우의 기억이 없는 것이 상황을 진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모저모 따져 봐도 원작에 없는 기억상실을 채용한 것은 불가피한 돌파구였다고 생각된다.

드라마 속에서 기억상실은 아주 흔한 소재이지만 역시나 기적적으로 기억을 되찾는 것 역시 드라마의 법칙이기도 한 때문이다. 사실 연우가 기억을 하건 못하건 왕 주변에서 액막이 무녀로 살아야 하는 모습은 애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 기억이 돌아오거나 혹은 숨겨 왔던 과거를 털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드라마 절정의 순간을 위한 아주 적절한 모티브가 될 것이다.

전자이거나 후자이거나 작가의 선택이겠지만 어떤 방향으로 흘러도 기구한 연우의 운명을 그리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장 씨가 연우를 무덤에서 꺼내던 날 그곳으로 찾아와 그 후로 함께하게 된 설이가 왜 연우에게 말을 해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도 당연히 생긴다. 그것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연우의 기억상실에 대한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탄력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장 씨의 당부로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연우와 설이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역시도 어느 쪽이건 둘의 관계를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데 문제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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