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할 때,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그에 적절한 역할을 맡아 주는 것. 그러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무리하지 않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 이런 돌파구를 만들고 절묘하게 포인트를 잡아주는 것. 이것이 1인자가, 능숙한 고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현존하는 어떤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남자의 자격이 비교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구요. 이들에겐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고수, 이경규가 기둥으로 버티고 있거든요. 그의 경험과 능력은 지금 이 프로그램에게 엄청난 보물이자 자산입니다.

사실 2011년이 이경규에게 주는 의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활약이 아닙니다. 라면업계의 판도를 바꾼 하얀 국물 라면의 등장을 만들어준 사업의 성공이 올 한 해 이경규가 거둔 가장 큰 성과였죠. 하지만 정작 본업인 예능 프로그램 내에서의 활약은 지난 몇 해에 비교하면 그리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힐링캠프는 그 내용의 충실함에도 시청률 면에서 여전히 월요일 밤 예능의 꼴찌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붕어빵의 안정적인 진행은 빛이 나지만 유별난 것은 아니었죠. 화성인 바이러스의 화제성은 그가 아닌 일반인 출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부활을 화려하게 알렸던 동력인 남자의 자격의 침체는 아픈 부분입니다. 제작진의 교체, 멤버들의 하차로 어수선했던 남자의 자격은 청춘 합창단의 에피소드로 여름을 모두 보내면서 그의 입지를 더더욱 줄여 버렸습니다. 지휘자 김태원을 제외하면 기존의 멤버 중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보여준 사람은 이경규였지만, 그 역시도 그냥 병풍에 지나지 않는 찬조 출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런 재정비와 방황 와중에 동시간대의 1위는 런닝맨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경규는 역시 이경규입니다. 이 시점에서 남자의 자격이 가장 필요로 했던 부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길을 열어 주었거든요. 여전히 흐릿한 새내기 젊은 멤버들의 캐릭터를 잡아주고, 그들 사이의 관계와 역할을 재확인해주는 것. 바로 미션이 아닌 사람에게 집중하는 길을 인도해준 것이죠. 바이크 특집의 마지막 10분이야말로 이경규가 왜 이경규인지, 남자의 자격의 기둥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시간이었어요. 예능 고수가 직접 나서서 가르쳐 주는 충실한 과외시간이었죠.

평생 야구장에서 오는 공을 받아치기만 했던 양준혁에게 욕먹어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하라면서 독려해줍니다. 좌우로 치고받으며 재치를 뽐내지만 좀처럼 융화되지 못하는 전현무에게 호흡과 어우러짐, 전체를 파악할 것을 말해줍니다. 원년 멤버이지만 여전히 캐릭터가 불분명한 막내 윤형빈에겐 겉과 속이 다른 잠재적 배신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설정만 가득한 이윤석에게는 자연스러움을 요구하죠. 맨토와 스승이란 자못 무거운 이미지가 반복되었던 김태원에겐 요령부리며 뒤로 빼는 가벼움을, 너무 무거운 김국진에게는 솔직함과 격이 없음이 필요하다고 충고하죠.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망가지고, 비난 받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근래의 남자의 자격 중에서 이경규가 전체 분위기를 주도하고, 내용을 이끌어갔던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이 시간동안 조금은 노골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지금의 남자의 자격이 부족했던 부분, 사람에 대한 포인트를 살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발판으로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지의 방향을 잡아준 것이죠. 멤버 하차에 의해 뒤틀려진 관계, 장기 프로젝트에 치여서 보이지 않았던 캐릭터를 제자리로 이끌어주는 정말 소중한 10분이었어요.

앞으로의 진행이 기대가 되는 훌륭한 예고편이었습니다. 거창한 구호, 멋진 소재 찾기도 중요하지만 결국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의 프로그램은 사람이 좋아서 보는 것입니다. 출연하는 이들에 대한 호감과 관심이야말로 처음이자 끝이거든요. 이경규와 남격의 제작진은 그 부분을 집고 넘어가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마무리했습니다. 이제야 미션과 사람이 함께 뒤섞이는 진짜 새 출발을 노리고 있어요. 예능 고수의 멋진 한 수. 역시 이경규는 이경규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