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나무에는 매회 명장면과 명대사가 생산된다. 그런 명장면 중에서도 베스트 3에 꼽힐 만한 집현전에서 세종(한석규)이 젊은 시절의 자신과 만나는 환상을 보게 되는 장면은 약간의 오해도 없지 않다. 짧지만 시청자들에게 대단히 큰 인상을 심어준 송중기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급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분량 늘리기가 아니라 당시 세종의 심리상태를 드라마틱하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으니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누리꾼 사이에 소위 이만원씬으로 불리는 석규 세종과 중기 세종의 만남은 사실 제작진의 상술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한석규가 제작진에게 제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젊은 날의 자신에게 침을 뱉는 세종의 과격한 동작까지도 직접 한석규가 생각해냈다는 것이다. 이는 뒤늦게 송중기의 인터뷰로 알려졌는데 앞서 송중기가 한석규를 “대본을 뛰어넘는 위대한 배우”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게 했다.

특히 젊은 이도를 향해 자기모멸의 극단적 행위였던 침을 뱉는 것은 한석규의 애드리브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한석규는 송중기에게 귓속말로 “침 뱉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라”고 귀띔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리허설까지만 해도 한석규는 침을 뱉을지 말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고는 최종 결정을 한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 광팬이라면 그저 드라마만 보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공홈에 마련된 각종 메이킹 필름까지도 섭렵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보면 한석규는 연출보다 더 적극적으로 배우의 동선을 그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경력 많은 배우로서의 경험으로 잘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한석규의 대본 분석이 철저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죽 대본에 몰입해서 세종을 연구했으면 대본에 없는 씬을 구상할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연기에 몰입해서 나올 수 있는 애드리브와는 아주 다른 작가적 역량을 보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다. 또한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인 작가와 연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카리스마가 하늘을 찌르는 모 작가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그 장면이 10회까지 통틀어 베스트 3에 꼽힐 정도라면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한석규가 뿌리깊은 나무를 자기 자신에 함몰되지 않고 큰 그림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흔히들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할 경우 약간은 냉소하는 편이다. 배우는 캐릭터에 갇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관찰하고, 구성해야 하는 감독의 역량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는 탓이다. 그러나 한석규의 이만원씬 제안은 그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주는 것이다. 자칫 젊은 세종 송중기의 꽃보다 화려한 연기변신에 묻힐까 걱정도 없지 않았지만 한석규는 자신에게 주어진 분량을 스스로 개척할 정도로 작품분석에 넓은 시야를 갖고 있는 것이다.

중기 세종에서 석규 세종으로 바뀌면서 먼저 시선을 받은 것은 소박하고 인자한 웃음과 중신들에 둘러싸인 갑갑함을 표출하는 욕세종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욕을 하는 세종은 한석규 이전에 영화 신기전에서 안성기가 먼저 선보인 바 있어서 신선도는 살짝 덜했다. 그런데 드라마의 장점이기도 한 반복 노출의 힘이 작용해 원조인 안성기의 욕세종보다 한석규의 욕세종은 갈수록 감칠맛을 더해가 마침내 원조(?) 욕세종을 넘어서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도 그렇듯이 세상이 모두 반대하는 한글창제를 놓고 부딪힌 고난에 대해서는 햄릿이나 파우스틀 연상케 하는 명연기로 진지세종의 모습 또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기름기 200%의 버터 발린 목소리로 한석규는 똥지게를 진 소박함과 자신을 혐오하는 그로테스크한 진지함 모두를 동시에 완성하고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작가와 감독이 놓친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내 드라마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칭찬만으로는 부족한 무섭도록 잘난 배우다. 그래서 일주일을 월화뿌뿌금토일이라는 뿌리깊은 나무 팬들이 더욱 늘어갈 수밖에는 없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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