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약속은 지극히 비극적인 드라마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어린 동생까지 챙겨가면서 서른이 돼서야 빚도 갚고 피자 라지사이즈를 시켜 먹을 수 있는 여유를 막 가진 때에 이서연(수애)에게 치명적인 두 사건이 동시에 벌어진다. 처음부터 헤어질 각오를 했다지만 그런 결심은 막상 이별 앞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른의 여자에게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고, 처음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별을 통보받는 심정은 차라리 중병에 걸려 죽고라도 싶은 아픔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약과였다. 이별도 아픈데 이서연에게는 그 아픔조차 사치로 여겨질 심각한 질병이 찾아왔다. 그것도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의 공통질병인 백혈병이면 폼이라도 날 텐데 이서연이 걸린 병은 치매였다. 노인에게 찾아와도 자신에게나 주변에게 참 잔혹한 것이 치매인데 젊디젊은 서른의 이서연에 치매는 욕세종이 대신 욕이라도 해줘야 할 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아한 이서연도 결국 입에서 육두문자를 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해피엔딩을 꿈꿀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극으로 꽉 채워진 전개다. 치매라는 병 앞에서 우선 모든 중병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서연은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메모지에 해야 할 일을 꼼꼼히 적어 체크하고, 길을 걸을 때도 혼자서 끝말잇기를 하며 자신의 기억이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질병의 초기 신드롬을 겪고 있는 이서연의 모습은 연민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이서연에게 명품논란이 일어났다. 가난을 이제 겨우 면한 처지에 어떻게 이서연이 명품을 두르고 다닐 수 있냐는 것이다. 이를 두고 명품이다 아니다라는 설왕설래가 있기도 했지만 명품 여부를 떠나 극심한 심적 방황을 하는 여자치고는 지나치게 우아하게 떨어지는 원피스의 태가 다소 비현실적으로 비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치매를 부정하는 이서연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더 반듯하게 꾸밀 거란 생각이 사실 캐릭터에 맞는 설명이 된다.

사실 PPL이 공식 인정되는 요즘 상황에 여주인공의 명품 협찬은 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천일의 약속 속 대사를 통해 드라마에 대한 비평을 작가 스스로 인정한 만큼 천일의 약속은 개연성 없는 협찬은 좀 힘들어 보인다. 그런 때문인지 수애가 직접 기자간담회에 나와 명품은 백 하나였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 브랜드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수애의 해명이 맞다면 결국 시청자의 눈에 명품으로 보였던 것들은 일종의 착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때 아닌 명품논란은 국내 브랜드를 입어도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드레수애의 비애인 것이다. 잘난 것이 죄라면 죄다. 명품을 두르고 나와도 관심도 없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국내 브랜드를 입고 나와도 명품이라고 의심을 품게 하는 수애의 명품 몸매를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 돼버렸다. 여기까지는 쓴웃음이라도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꺼진 불에 기름을 붓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보태졌다.

천일의 약속 김영섭 CP는 "요즘에는 고등학생도 명품을 들고 다니지 않나. 극중 수애가 출판사 팀장으로 나온다. 빚도 다 갚은 것으로 나오는데 왜 명품을 들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명품논란에 개연성을 중시하는 김수현 작가까지 나서서 사실을 확인하는 나름 중대한 상황에 할 말은 아니었다. 극중 이서연이 명품을 한두 개 소유할 정도의 수입은 된다. 허나 고등학생들도 명품을 들고 다닌다는 말은 명품과 거리가 먼 시청자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발언이고. 불필요한 사족이었다.

드라마를 총괄하는 PD로서 수애가 직접 나서서 해명하는 마당에 그저 “오해였다‘는 정도면 점잖고 무게도 있는 첨언이었을 것이나 괜한 말 한마디에 반감만 산 셈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거꾸로 천냥 빚을 지게도 한다는 의미다. 한참 대본 쓰고 연기하기에 바쁜 작가와 주연 배우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끝낼 일에 괜한 불씨를 남긴 아쉬운 발언이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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