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 사극같지 않은 것이 요즘 사극들의 특징이다. 사극은 특히 서사성이 중요한데 최근의 사극들은 서사에서 번번히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사 백동수도 월화극의 1위를 달려가고 있지만 사실상 스토리의 부재가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다. 무협극이라는 것이 다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아닌 연속극으로서 이야기가 허술하다는 점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무사 백동수는 기본 이상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배우들의 존재감 특히 이제 곧 퇴장을 예감케 하는 최민수의 무서운 카리스마가 스토리의 빈 곳을 잘 채워준 탓이 크다.

과연 영화를 찍는다 해도 최민수가 표현하는 살수 천의 카리스마 이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무사 백동수는 타이틀과 달리 지금까지는 최민수가 주인공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민수와 겨룰 대상이 마땅히 없다는 점이다. 조선제일검으로 전광렬이라는 명배우가 출연하고 있지만 그에게서는 어쩐지 무사의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역에 의존해야 하는 액션신 때문은 아니다. 그에게는 무사 특유의 피냄새가 없다.

그러나 최민수에게는 무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살수로서의 연기 이전의 본능적 짐승이 느껴진다. 아니 짐승 그 이상의 아귀마저 느껴져 문득문득 소름이 돋기도 한다. 어차피 무협의 액션은 영상조작에 달려있다.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면 시간 때문에라도 대역이 많은 부분을 대신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최민수는 꽤나 많은 부분을 소화해내고 있으며 때로 그 특유의 폼 나는 검투의 마지막 동작을 통해서 대역을 느끼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

16회에서는 살수 천의 본능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났다. 살수로서의 삶을 마치고 흑사초롱을 떠나려는 최민수는 전국의 고수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마지막 상대는 검선 김광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조차 1인자의 욕심보다는 검술 그 자체에 대한 탐닉일 뿐이다. 살수집단 흑사초롱의 천주로서 살아오는 동안 검을 뽑는다는 것은 살인을 의미할 뿐 검의 경지에 대한 의미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천은 평생 들고 다녔지만 거꾸로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한 검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선과의 마지막 일전을 맞기도 전에 천주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왔다. 청으로 도망쳤던 인주 박철민이 대단한 고수와 함께 병조판서에게 관군까지 동원해 천주와 인주 그리고 황진기까지 모두 섬멸하려는 음모에 걸려들었다. 개연성 문제는 이 부분에서 잠시 접어둘 수밖에 없다. 양초립이 홍국영이 될 정도로 황당한 반전이 벌어질 정도니 이 상황을 만들어내는 작가 전지적 비약은 오히려 애교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당대의 고수들이 어이없이 화살에 모두 당하고 만다. 황진기 그리고 황진주의 친모 지주까지. 그리고 지주가 화살에 맞자 진주의 입에서 터져나온 ‘엄마’소리에 갑자기 패닉상태에 빠진 천주까지 화살을 어깨에 박고 말았다. 그러자 최민수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모녀에게 다가간다. 죽음까지 초월한 살수지만 과거 사랑했던 여인 지주의 딸이 있다는 말에는 습격의 위급한 상황을 자신의 등으로 일단 막아낸다.

이후 벌어지는 검투에서 천주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흑사초롱 천주의 표정이 아니라 정을 느끼는 인간의 표정이었으며, 분노에 치떠는 짐승의 숨소리였다. 거기다가 지주의 입에서 더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그 부분은 시청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봐서 분명 김광택의 딸로 알았던 진주가 천주의 딸이라는 말이니 들으면서도 믿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지주가 평생 품어왔던 비밀을 내뱉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지주의 죽음은 천주의 분노를 극강으로 끌어올리는 전개를 짐작할 수 있다. 평생 살수로 살아온 천주의 분노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만들겠지만 무협의 공식상 그럴 경우 고수는 죽음을 맞게 된다. 과연 천주가 죽어서도 무사 백동수의 인기가 지속될지 의문이긴 하지만 드라마가 본래 목적대로 정조 암살을 둘러싼 백동수와 여운의 갈등 구조로 가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천주 최민수가 죽음으로 드라마를 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불길하긴 하지만 황진기 산채에서 벌어진 천주 최민수의 열연은 인상적이었다. 칩거 후 돌아와 보였던 아버지의 방 그리고 작년의 로드 넘버원 때 보였던 연기와 다른 어쩌면 최민수가 아니면 국내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아귀의 연기를 보였다. 강심장에 출연해서는 칩거하는 동안 귀신을 여러 번 체험했다고 했는데, 귀신들도 16회의 최민수를 본다면 좀 무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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