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인재”라는 담론

햇빛을 마지막으로 본 때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장마에 이어 멈출 줄 모르는 폭우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폭우가 시작되던 첫날부터 강남역, 대치동, 사당, 신림역, 광화문 등 도심 곳곳에서 침수사태가 일어나더니 급기야 우면산 일대의 산사태라는 대형 참사로까지 이어졌다. 중앙재난본부에 따르면 지난주부터 내린 폭우로 7월 30일 오후 5시까지 전국에서 62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되었다고 하니 지금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해도 뒤늦을 지경이다. 비의 양으로 보나 피해 상황으로 보나, 이번 재난은 단순한 일회성 사고(accident)가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지역 공동체의 위기/위험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 원인을 단지 기상이변의 문제가 아닌 ‘인재(人災)’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재난에 대한 오래된 담론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강우량과 피해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자 대표적 현장 밀착형 매체인 트위터로부터 그 책임소재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트위터의 특성인 순발력과 풍자가 어우러지면서 무상급식을 ‘무상급수’로, 오세훈 서울시장을 바다의 신인 ‘오세이돈’으로 패러디한 단문과 이미지들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한겨레, 경향 등의 언론에서는 디자인 서울을 위한 화강암 도로블록 포장과 같은 “전시행정에 치중한 결과”, “서울시 수해방지 예산보다 세 배나 많은 무상급식 반대투표 비용” 등을 지적하며 재해 방지 소홀에 대한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또한 언론에서는 공세적으로 다뤄지지 않았지만, 트위터와 인터넷에서는 이번 재난의 원인 중 하나로 이명박 정권의 4대강 공사가 또한 꼽히고 있다. 폭우가 계속되면서 그 피해 또한 확산되어 가는 와중도 책임 소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선일보는 이런 비판적 담론에 대해 “남의 불행으로 장난치는 사람들... 인터넷 ‘폭우괴담’도 홍수”라는 기사를 필두로 본격적인 역공에 나섰다(조선일보 7월 29일자).

▲ 7월 29일자 '조선일보' 4면 기사

지금/여기의 위험에 대한 담론의 요소

비록 지역의 도시행정과 계획에 대한 비판일지라도 재난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형식은 정치적 담론의 중요한 경향을 드러내 준다. 특히 이번 수해에 관련된 ‘진보’ 측의 비판은 그 책임소재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다른 정치적 담론과 동일한 형식을 취하지만, 상이한 맥락에 놓여있다. 동일하게 공동체의 위기/위험을 다루어도 한미 FTA나 무상급식과 같은 비판이 다루는 대상은 ‘앞으로 닥쳐 올 위기/위험’이다. 반면 며칠 째 계속되고 있는 폭우로 인한 재해는 지나갔거나 다가올 것이 아닌, ‘지금 진행 중인 위기/위험’이다. 수해와 같이 지역 공동체들의 파괴와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여기서의 비판은 정권이나 행정 책임자와 같은 ‘개인을 향한 공세’보다, 당장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다급한 필요와 요구를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관계 당국에 요구할 것인지가 우선되어야 한다. 흔히 저널리즘에서 말하는 당사자 저널리즘(native journalism)이 가장 시급히 요구될 때란 바로 공동체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일 것이다. 적어도 이런 위기에서 강남과 강북, 있는 동네와 없는 동네의 피해와 참사에 경중을 따지는 것은 지금 당장 해야 할 구분은 아니다. 당연히 재난에 대한 책임소재의 규명과 장기적 대책 요구는 비판적 담론이 갖춰야할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비판적 담론의 근거와 그 대상의 앞뒤가 뒤바뀔 경우, ‘진보’란 제도 정치 내 특정 세력의 지지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더욱이 그 비판적 담론의 원인 규명이 특정 정권이나 책임자와 같은 ‘인물’에 맞춰질 경우, 근본적인 원인 규명에 실패할 위험 또한 존재한다. 작년 말과 올해 초 전국을 사지로 만든 구제역 파동 당시 그 원인은 MB 정권의 안일한 대응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그 시작이 노무현 정권 때 도입한 중앙집중적 대형 축산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1) 무수한 정의와 설명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담론을 일종의 ‘문제틀(the problematic)’로 본다면, 특정한 방향으로의 문제제기란 답할 수 있는 선택지들을 이미 정해 놓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비판적 담론

이런 맥락에서 흔히 ‘사람에 대한(to the man)’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라틴어 ‘ad hominem’의 두 가지 의미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흔히 논리학에서 대인 논증, 또는 ‘인신공격의 오류’로 사용될 때이다. 즉 특정한 주장의 진리여부를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의 부정적 인격이나 신념에 연결지어 판단하는 오류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 나아가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species being)의 존재론적 특성에 입각하여 주장이나 이론을 입증하는 방식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 인간(the man)은 특정한 개인, 정당, 단체나 정치적 세력으로 협소화되지만, 후자의 경우 인간은 공동체(commune)나 인간이 갖춘 내적 지향성으로 확대된다.2) 이런 두 구분은 비판적 담론에서 특히 중요해진다. 이번 수해를 예로 들어 보자. 오세훈 시장과 이명박 대통령에 집중된 비판은 늘 그렇듯 ‘인신공격’ 또는 ‘정치 공세’라는 역공을 맞는다. 이 역공에 대한 반비판이 시작되는 순간 비판적 담론의 지형에서 정작 그 출발점이었던 공동체의 고통과 위험은 배재되고 만다. 반면 비판의 근거가 개인이 아닌 위험/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된다면, 그들이 누려야 할 생존권 및 행복권과 같은 기본적 요구를 억압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경향들에 대한 비판으로 담론은 확장된다. 물론 이 확장의 과정에서 오세훈 시장과 이명박 대통령이 배재될 일은 결코 없다.

▲ 네티즌들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형상화해 만든 '오세이돈'의 모습
공동체의 위기/위험에 대한 공감과 연대에서 비롯되는 비판의 중요성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다시 말해 저널리즘의 언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총체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언어’란 특정한 정당이나 좌/우파를 지지하는 편향적 언어가 아니다. 바르트(R. Barthes)에게 정치적 언어란 개념이 아닌 말하는 사람의 행위(결과)를 가리키는 언어이다.3) 즉 목수가 자기 앞에 있는 나무를 ‘나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그의 육체적 ․ 정신적 활동이 가해진 산물로서의 나무이며 따라서 그 때의 나무란 기호가 아닌 실제 대상으로서의 나무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나무’를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나무라는 개념(concept)을 상대와 공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목수는 “나무를 말하지만”, 일반인들은 “나무에 대하여 말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수해로 고통받고 삶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들을 위해 비판적 담론을 구체화하는 저널리즘의 언어에는 그들에 대한 연대와 공감이 필수적이다. 수해를 겪어보았고, 지금 겪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과 직접 잇닿은 “수해를 말하지만”, 이를 두고 오세훈과 MB를 비판하기 위해서만 수해를 말하는 경우는 “수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때 비판의 언어는 공동체의 고통에는 침묵하면서 수해라는 개념을 통해 특정 인물과 정권만을 비판하는 제도정치의 언어가 되고 만다. 결국 이런 비판 담론은 수해를 입은 이들과 공동체로부터 “자신들의 고통을 핑계로 정쟁만을 일삼는 똑같은 놈들”이라는 힐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좌파’만의 언어와 담론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폭우괴담’ 수사가 노리는 것

이런 까닭에 최근 폭우피해와 관련하여 경찰이 수해방지 예산 삭감과 같은 서울시 정책과 오세훈 시장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악의적 허위사실 유포에 엄정 대응”하겠다는 소위 ‘폭우괴담’ 수사는 표현의 자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이런 공세는 이번 수해에 대한 비판적 담론에 있어 그 형식이 가진 ‘인신공격(ad hominem)’의 오류를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고통받는 공동체들과 상관없는 ‘정치적 공세’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째 멈출 줄 모르고 내리는 폭우도 짜증나는 마당에 괜한 꼬투리를 잡는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와 같이 중대한 정치적 국면에서의 비판적 담론만 무게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꼬투리의 핑계를 대자면, 수해와 같이 특정한 정치적 편향이 없는 공동체의 위기/위험에 대한 담론 속에 내재된 한계는 총선이나 대선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더 큰 오류와 함정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기우 때문이다.

1) 우석훈, “구제역 사태 진짜 진범은 이것”, 시사인 2011년 3월 4일자.

2) ad hominem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작가는 바로 마르크스이다. 그는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인간을 놓고(ad hominem) 증명하는 순간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는 순간 인간에 대한 것으로(ad hominem) 증명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Marx, K.(1844), "Introduction to the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

3) R. Barthes(1972), “Myth on the Left”, <mythologies>, NY: The Noonday Press.

Modus Vivendi(모두스 비벤디)란 양식 혹은 방식을 뜻하는 라틴어 Modus와 삶을 뜻하는 Vivendi의 합성어로 “생활양식”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기 위해 서로 경합하는 이들 사이의 ‘잠정적인’ 적응이나 타협을 숨은 의미로 담고 있습니다. 삶의 잠정성이란 달리 보면 불안함이기도 합니다. 국가권력, 자본, 그리고 미디어와 같은 완고한 대상과 우리의 삶이 맺어지는 방식 또한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불안하지 않을까요?

이 코너에서는 바로 그런 불안함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해보려 합니다. 모든 완고한 것들의 불안함을 드러내는 작업이야 말로 비판의 목표이며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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