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패>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래적의 두령이 된 천둥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귀동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일까요? 조선달의 죽음과 취조를 당하는 임포졸과 종사관의 납치, 친부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천둥은 과연 자신이 김대감의 친자임을 언제 알게 되는 것일까요?


아버지에 총을 겨누는 천둥,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나?

관청에서 자료를 빼내 아래적에게 전해주던 임포졸은 귀동에게 잡힌 후 죽을 정도로 취조를 당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래적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는 그는 강포수와 다름없어 보입니다. 뒷돈 주고 들어온 포졸들과는 달리, 정식 절차를 밟고 들어온 임포졸은 언제나 강직한 모습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아야 하고 누가 자신에게 좋은 동아줄인지 알아야 한다는 포졸들의 사담들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면서 민심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안위를 돌보며 상사의 눈치만 잘 살피면 된다는 그들의 발언은 작가가 마음먹고 현재의 우리를 풍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정부패와 비리가 만연한 공직 사회에서 과연 민심을 생각하고는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과연 그들에게 국민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봉사하고 모셔야 하는 존재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에게 국민들은 자신들의 월급을 채워주는 존재이고 돈벌이에 유용한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를 하는 족속이나 관직에 올라 나라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나 그들이 그 자리에 올라서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하는 선서는 모두 거짓이고 형식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나 국민이 아닌, 출세에 도움이 되는 존재들만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물론 귀동이나 임포졸처럼 잘못된 관행을 바꾸고 올바른 관직상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들의 외침만으로 썩어 문드러진 관료 사회가 바뀌기 힘든 게 현실이지요. 과거나 현재나 전혀 바뀐 것이 없는 그들만의 리그 속 그들만의 세상은 철저하게 그들에게만 의미 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짝패>를 통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분명해졌습니다. 관직을 가지고 그 안에서 변화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귀동이 현실의 두터운 벽에 갇힌 채 변절하지 않은 것만으로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삶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보다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과감하게 아래적이 된 천둥 역시 그 변화의 중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호합니다. 역사가 이야기를 하듯, 아래적의 변혁이 성공하지는 않았습니다. 실패한 그들의 외침이 역사가 이야기하는 대단한 성공은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그 변화에 목말라하던 민중들은 반상의 법도를 뒤엎고 모두가 양반이 되는 세상 혹은 모두가 상놈이 되는 세상이 되도록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외부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하지만 그런 세상을 원했던 민중들의 바람이 없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 간절함이 누군가에게 세상을 바꾸도록 요구했고 강포수가 이야기를 하듯, 햇불을 들고 망루에 올라선 이가 있었기에 그 변화의 흐름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천둥이 원하던 세상은 구현해 냈다고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아래적이 공통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일순위로 친부 김대감을 꼽는 상황에서 그는 잠시 고뇌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친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짝패 귀동의 아비를 자신의 손으로 처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힘겨움으로 다가올 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호판을 모시고 있는 김대감에게 총을 겨누고 그런 천둥에게 칼을 들이대는 김대감. 건곤일척의 상황에서 김대감은 당연히 천둥을 내리칠 수는 없을 겁니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장면만을 보면 그들의 운명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도록 요구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김대감이 천둥이 아래적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떤 선택을 할지는 분명합니다.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친자인 천둥을 살리려는 노력이 수반될 수밖에 없고 그런 죽음은 천둥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도 궁금하게 합니다.

자신을 천둥에게 보내려는 김대감에게 거칠게 대항하는 동녀. 그녀는 과연 귀동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천둥이 청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녀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알 수 없지만 김대감에 맞선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반상의 법도만을 맹신하며 살아왔고 외쳐왔던 그녀가 갑자기 신분이 달라진 귀동과 천둥을 바라보며 표리부동한 행동을 할 수 없어 몽니를 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은 동녀를 더욱 밋밋한 존재로 만듭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현재까지 쌓여진 이미지를 한 순간 바꾸기에는 무리가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린 동녀는 <짝패>에서 가장 실패한 존재입니다.

임포졸을 구하기 위해 종사관을 납치한 아래적은 서로를 교환하는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여야만 합니다. 천둥과 귀동이 서로 다른 신분으로 칼을 겨누는 상황은 모진 운명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수순이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부패한 사회의 몫일 겁니다.

많은 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조선달이 죽었지만 그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이해당사자들이 모두 범인에서 빗겨가 있는 상황에서 과연 누가 조선달을 죽였는지는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1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돈이 아닌 조선달의 목숨만을 탐했다는 것은 그와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일 겁니다.

현재로서는 조선달을 죽인 범인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드러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복장은 아래적이었지만 그들이 조선달을 죽여야 할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천둥이 그런 일을 시켰을 리도 없습니다. 막순이나 귀동, 그리고 김대감 모두 조선달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조선달의 죽음은 더욱 모호해질 뿐입니다.

조선달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고 그 일로 인해 누군가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저 놀음패들 중 하나가 죽였다고 해도 상관없는 그의 죽음은 <짝패>에 어떤 의미일까요?

갖바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자 권력에 대항하기보다 그에 빌붙어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걸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우리 대다수의 모습입니다. 간포졸이 이야기를 하듯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하며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멀어 민중들의 아픔을 저버린 이들도 있고 임포졸처럼 부패한 관료 사회를 깨트리려 노력하는 이들도 있는 게 우리 사회입니다.

<짝패>가 그 어떤 특별한 변화의 이야기나 드라마 특유의 재미보다는 우리 사회를 반면거울 삼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도 해봅니다. 처음과는 달리 용두사미가 되는 듯해 아쉬운 이 드라마도 이제 5회가 남았습니다.

천둥과 귀동, 동녀와 달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천둥은 자신의 뒤바뀐 운명을 어느 시점에서 알게 될까요? 바뀐 운명을 알고 나서도 천둥은 아래적의 두령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할까요? 남은 5회 동안 작가는 <짝패>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지 궁금해집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