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가 마침내 결말을 맞았다. 김인숙과 한지훈은 자신들이 원하던 모든 목적을 이루고 사라졌다. 이 사라짐을 죽음이라고 쉽게 생각해도 좋고, 생떽쥐베리처럼 단지 사라졌다라는 여운을 길게 가져가도 좋을 것이다. 꽤나 멋부린 결말이다.
로열패밀리의 성공에는 대진운도 거들었다. 경쟁작 49일이 전반적으로 가벼운 판타지 멜로 분위기이지만 이 드라마도 몰입하기 위해서는 머리 쓸 일이 적지 않다. 그리고 환생이라는 맑은 코드 자체가 막장 드라마에 욕하면서 몰입하는 시청률 부대의 취향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로열패밀리는 대단히 어려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수장인 재벌가에 도전하는 천한 출신의 여자라는 구도가 매혹적이었다. 변형된 신데렐라 코드가 작용했다는 점이다. 한국 드라마의 재벌병은 좀처럼 치유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종영했으니 원작과의 내용 비교가 필요하다. 사실 로열패밀리가 원작 인간의 증명에서 가져온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장 큰 공통점인 조니 헤이워드라는 요소마저도 많이 희석했다. 특히나 원작에서 흑인이었던 조니를 잘 생긴 백인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굴복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쉬운 것은 일본 드라마에서 조니 살인사건을 쫓는 다케노유치 유타카같은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로열패밀리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권음미 작가는 다케노유치 대신에 지성을 택했고, 진실에 대한 추궁보다는 청맹과니 같은 맹목적 애정을 주입했다. 어느 쪽이 더 낫냐는 질문은 우문이다. 조니 헤이워드를 흑인에서 백인으로 탈태환골시켜야 했던 것처럼 작가는 근친살인의 무거운 주제를 법의 무죄, 인간의 유죄라는 화두로 슬쩍 바꿔버려야 했다. 결과도 그렇다. 일본드라마는 아들 살해라는 주제에 대해 유죄를 한국드라마는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게다가 김인숙의 밝은 미소마저 허가했다.
과연 김인숙의 웃음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일까? 종영의 명장면은 지성이 염정아를 추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김인숙의 법적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싸이코 드라마 같은 것이었다. 조니가 죽게 되는 과정은 일본과 한국이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119에 전화를 한 것이다. 양쪽 조니가 모두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선택했고, 그 후에 엄마를 보호하려고 사건 현장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한 것은 같다. 물론 일본쪽 엄마는 살인의 의지를 가졌던 것에서 좀 더 유죄의 요건을 갖췄다고 할 수는 있다.
로열패밀리의 결말은 재벌가 내부의 욕망의 암투에 대한 결론은 될 수 있지만 조니 헤이워드를 죽음으로 몰아간 김인숙에 대한 결론은 아니다. 마지막까지도 한지훈은 김인숙을 위한 여과장치였다는 것이 아쉽다. 마지막 추궁이 김인숙이 범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충분한 고해성사였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한지훈은 단죄가 아니라 용서를 위한 연극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인숙은 원작의 코오리보다 좀 더 복잡한 인물이다. 이태원 마리 시절 미군을 살해한 것은 정당방위겠지만 조니를 죽게 한 것은 욕망을 방어하기 위한 회피였다. 조니의 죽음이 원작과 로얄패밀리에서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인간 혹은 욕망에 대한 아픈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해 원작은 또 다른 질문으로 드라마를 끝맺었다. 그 대사의 내용은 이렇다. “일본인의 마음 같은 것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거겠지?”하는 질문이었다. 그 여운이 태양 속으로 사라진 헬기보다 결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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