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까요? 일단 언제나 그렇듯이 사담을 잠시 읊어야겠습니다. 사실 <써니>는 전혀 기대하지 않던 영화입니다. 기대는커녕 이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여기저기서 <써니>라는 제목이 오르내리기에 뭔가 찾아봤지만, 그 후에도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제목부터가 땡기질 않았고 10여 명이 넘어가는 배우들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감독 : 강형철'이라는 글자를 보고 난데없이 호기심이 급증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년 4개월 전에 "한국식 코미디,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제목으로 리뷰를 쓴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가 다름 아닌 강형철 감독의 데뷔작 <과속 스캔들>입니다. 당시 제가 했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한국의 코미디 영화는 좀처럼 코미디로서 매듭을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강박증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어떻게 해서든 감동을 주입하려고 갖은 발악을 하면서 스스로 좌초하는 꼴을 보인 영화가 부지기수다. 그냥 본분에 충실하여 관객을 웃기기만 해도 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과속 스캔들>만큼은 다르다. 결말부까지 결코 무리하지 않으면서 영화의 이미지를 온전히 남겨둔 채로 퇴장한다. 부디 이런 방식의 영화가 한국식 코미디의 표준이 되었으면 한다".

이런 찬사를 헌사했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차기작이 <써니>라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마침 이른 시사회에서 보신 분들의 평도 긍정적이라는 소문이 들려 기대치는 더욱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원자를 분해하듯이 없는 시간을 쪼개 몇 시간 전에 직접 <써니>를 관람한 결과, 감히 개봉 즉시 달려가서 필히 관람하시라고 추천하고자 성급하게 글을 쓰는 중입니다. 누구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가시든 관계없습니다. 친구도 좋고 연인도 좋고 부모님도 좋습니다. 행여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나 여자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이 걸린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언하건대 <써니>는 세대와 성별을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써니>는 전작 <과속 스캔들>의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오히려 전작보다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좀 더 소박하고 상투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점에 따라서는 추억을 먹고 존재하려는 영화의 하나라고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와 캐릭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이 전보다 훨씬 배가되었습니다. 시나리오 자체는 극히 단순합니다만, 그걸 화면으로 옮겨와서 풍성하게 보이게끔 만드는 연출력은 그야말로 탁월합니다. 쉽게 말해 뻥튀기를 시켜도 제대로 시킨다는 얘깁니다. 일전에 아는 분과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어떤 주제를 던져줘도 책 한 권을 너끈히 써낼 사람이라고. 강형철 감독 역시 그런 분일 듯합니다.

다음으로 <써니>는 플래쉬백을 통해 1980년대와 201X년을 오가는 영화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시대에서 동일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자그마치 10여 명에 이릅니다. 이 정도면 관객이 캐릭터를 혼동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고 그러는 것이 정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둘째치더라도 이만큼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면 이야기가 산만하거나 일부는 소모적인 캐릭터로 전락할 우려가 큽니다. 하지만 <써니>는 희한할 만큼 모든 캐릭터의 존재감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강형철 감독의 지혜가 큰 공을 세우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역배우일 때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덜한 캐릭터가 있다면 성인배우가 모자란 부분을 채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짧은 등장에 그쳐도 전달하는 울림만큼은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배분한 각 캐릭터의 역할이 워낙 치밀한 틀에 맞춰 돌아가다 보니 이야기마저 살아납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입장을 바꿔 <써니>의 개봉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배우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없었습니다. 이건 아역배우(?)나 성인배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딱히 주목할 만한 - 또는 스타성이 부족한 - 배우가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요!? 보는 내내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아역의 경우에는 주인공이랄 수 있는 심은경을 비롯한 칠공주는 물론이고, 조연이나 단역에 불과한 배우들마저 혀를 내두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듭니다. 도대체 저런 배우가 어디에 있었고 감독은 또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게다가 연기력을 차마 기대할 수 없었던 민효린도 본인의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캐릭터를 부여받은 덕택에 제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

아역배우들이 <써니>의 코미디를 담당하고 있다면 성인배우들은 영화에 깊이를 더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써니>에 출연한 성인배우들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낱낱이 깨뜨렸습니다. 실은 아역배우보다 성인배우들이 더 끌리지 않았었는데, 역시 나이는 그리고 연륜과 내공은 허투루 쌓이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더군요. 여태까지는 한번도 호감을 가진 적이 없었던 유호정, 진희경, 이연경에 이어 누군지도 몰랐던 김선경 등도 감성을 물씬 자극하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물론 강형철 감독의 연출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그 연출력을 마이더스의 손으로 만들 수도, 무용지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모든 영화에서 차지하는 배우의 궁극적인 비중입니다.

결정적으로 <써니>가 참으로 맘에 드는 이유는 여전히 가벼움의 미학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늘상 억지 감동을 주입하려던 것이 좋은 영화가 될 뻔했던 졸작들의 공통된 패착이었습니다. 그걸 깨뜨리고 초지일관 코미디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것이 <과속 스캔들>의 특장점입니다. 강형철 감독은 두 번째 작품인 <써니>에서도 역시 그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사실 심각한 영화도 아니고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재미있게 즐기고 추억을 향유할 수 있는 선물을 안겨주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예술영화에 비해 가치가 뒤떨어지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현실은 다르더라도 우리가 이상적으로 꼽는 사회의 모델이 무엇인가요?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최소한 판, 검, 의사가 되라고 부추기면서 그게 아니면 '루저'로 한 인간을 격하시키는 사회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겠죠. 영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영화가 예술영화가 될 필요도,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가 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정체성에 걸맞은 완성도를 가진 영화라면 충분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벼움의 미학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은 <써니>는 수작에 다름 아닙니다.

<써니>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상을 영화에 적극 반영하진 않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요소를 얹으려는 듯한 기운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본격적으로 영화의 색깔을 정치적으로 물들이지 않습니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버티던 인간 아닌 인간을 카메라로 잡으면서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거나, 그 인간 아닌 인간이 국민을 탄압하는 데 쓰던 도구로 전락했던 이들을 등장시키면서도 딱히 극에 영향력은 행사하지 않는 것, 그리고 또 그 인간 아닌 인간에게 맞서던 시대의 젊은 청춘을 슬그머니 뒤로 빼버리던 대목은 <써니>가 가진 가벼움의 미학을 잘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쉽기도 합니다만, 이건 원성이나 비판이 아니라 말 그대로 더 빼어난 영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의 아쉬움입니다.

강형철 감독은, 그리고 <써니>는 세 가지의 미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절제의 미덕, 웃음의 미덕, 단절의 미덕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위에서 말한 가벼움의 미학과 궤를 같이 하고 있어 별도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단절의 미덕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영화의 결말부입니다. 즉 영화의 이야기와 캐릭터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하도록 미연에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세 가지의 미덕이 한데 어우러져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것이 지금의 <써니>와 과거의 <과속 스캔들>을 있게 한 원동력입니다. 흥행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써니>가 <과속 스캔들>의 벽을 넘은 영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

덧 1) 음악 없이는 <써니>를 논할 수 없습니다. '무한도전'으로 현 세대들에게도 익숙한 보니 엠의 'Sunny', 1980년대의 감수성과 소피 마르소에 대한 판타지가 담긴 리차드 샌더슨의 'Reality', 신디 로퍼의 히트송을 리메이크한 턱 앤 페티의 'Time After Time' 등의 팝송 그리고 나미의 '빙글빙글',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조덕배의 '꿈에' 등등. 1980년대의 음악을 좀 들었다는 분들은 <써니>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될 겁니다.

덧 2) 그 중에서도 'Reality'의 쓰임새, 정확히 말해 수차례 나오는 패러디는 가히 기가 막힙니다. 아주 빵빵 터집니다.

덧 3) 강형철 감독의 센스는 단연 발군입니다. 대사와 캐릭터 설정, 이름 등에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섭렵하는 초월적인 유머 감각을 발휘합니다. 주요 캐릭터 두 명의 이름이 나미와 하춘화인 것만 봐도 잘 수 있죠? 아울러 과거와 현재의 장면을 이어붙이는 접점의 연출도 돋보입니다. 특정 사운드를 듣고 "어, 뭐지?"하는 순간 현재를 비춥니다.

덧 4) <써니>는 제 바로 윗세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현재의 나이로 치자면 40대 초, 중반 정도의? 고로 저는 좀 어중간한 나이대지만, 반대로 보면 중간에 걸친 것이 오히려 영화를 즐기는 데 큰 도움이 된 것도 같습니다.

덧 5) 제 기억으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웃느라 박수를 친 건 <써니>가 처음입니다. 심지어 웃다가 배가 아파서 극장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심정도 느꼈습니다. 연신 감탄사를 토해냈고, 초반엔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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