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군요. 아, 그렇다고 벌써부터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재미있다"의 주어가 될 대상은 영화가 아니라 감독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감독의 특이한 필모인데, <한나>를 연출한 조 라이트의 이전작으로는 <어톤먼트, 오만과 편견, 솔로이스트>가 있습니다. 모두 서정적이거나 혹은 문학에 기반을 둔 서사시적인 영화로 드라마가 주를 이루고 있죠. 그런 감독이 액션영화를 연출했다는 게 좀 의아했습니다. 그나마 <한나>를 보기 직전에야 이 사실을 알았네요. 하긴 케네스 브레너는 <토르>를, 샘 멘데스는 새 007 영화를 연출하니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긴 합니다.

<한나>는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언뜻 봐도 가냘픈 체구의 소녀가 순록을 쫓고 있습니다. 이윽고 한 발의 화살을 맞은 순록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지고, 소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배를 가릅니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소녀의 뒤로 몰래 다가와서 말합니다. "넌 지금 이 순간에 죽었어". 그의 말은 단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고, 두 사람은 이내 실전 훈련으로 보이는 격렬한 육탄전을 벌입니다. 이 격투가 끝나고 나면 서로 죽일 듯이 싸운 소녀와 남자가 부녀지간임을 알게 됩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나는 아버지와 함께 핀란드의 이름 모를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녀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훈련을 하며 아버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한나는 5개 국어 이상을 할 줄 아는 영리한 살인병기로 자라났습니다. 한창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뛰어놀 나이임에도 아버지에 의해 냉혹한 킬러로 자라난 이유는, 오래 전에 어머니를 죽인 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됐다고 판단한 한나는 일부러 위치를 노출시켜 제 발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 피의 복수를 감행합니다.

조 라이트에게 있어 이색적인 작품으로 보였던 <한나>의 오프닝은 예상 외로 인상적입니다. 소녀가 가진 순수함을 상징하려는 듯한 눈을 깔고 있지만, 소녀는 그 이미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행동을 태연하게 해보입니다. 게다가 일부러 순록의 심장을 관통시키지 않은 걸 보면 흡사 순수악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오프닝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의 구현도 뛰어난 편입니다. 소녀의 가쁜 호흡을 그대로 살리며 따라가는 촬영과 빠른 편집 등이 꽤 감각적이라 적잖이 놀랐습니다. 감독의 이전작을 감안하면 이런 영상에도 일가견이 있으리라고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죠.

오프닝 외에도 <한나>에는 감각적인 영상이 종종 등장합니다. 후반부에 트레일러의 공간을 감옥으로 활용한 씬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갈 때는 연극적인 요소까지 엿보이더군요.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영상과 어우러지는 음악은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보다 음악에 더 끌렸는데,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역시!"라는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한나>의 음악을 빚은 이가 다름 아닌 '케미컬 브라더스'거든요. '프로디지'와 함께 일렉트로니카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듀오의 솜씨는, <트론 : 새로운 시작>의 '다프트 펑크'와 견주어도 전혀(당연히!?) 손색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영상과 음악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썩 맘에 드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조 라이트의 연출 자체는 분명 일정 수준을 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대 이상이기도 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확인하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심지어 전 그가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이라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그만큼 이미지를 수놓은 영상의 테크닉이 뛰어납니다. 특히 한나와 친해진 소녀가 한데 누워 속삭이면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주로 클로즈업을 사용하면서 아슬아슬하고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매끄럽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결정적으로 내러티브와 연출이 어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한나의 복수극이고, 다른 하나는 낯선 세상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소녀의 성장기입니다. 이것이 영화상에서 서로 부합하지 못하고 상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어느 것에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본격적인 액션영화로 만드는 편이 훨씬 나은 결과물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액션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 <한나>를 액션영화로 알고 보시는 분들은 지루함을 느끼기 십상일 겁니다.

시얼샤 로넌의 존재감은 <한나>가 거둔 최대의 수확입니다. 이 어린 소녀의 연기력은 예상하지 못했던 조 라이트의 영상 연출과 함께 <한나>를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시얼샤 로넌이 보여주는 10대 소녀의 심리를 드러내는 듯한 불안하고 신비한 표정은 단연 발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번 고민을 해봐도 <한나>는 액션도, 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입니다. 물론 둘이 적절하게 섞이지도 못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대사는 묵직하지만, 곧이어 보이는 결말부의 허탈함이 <한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


덧 1) 오랜만에 본 에릭 바나는 여전히 멋있더군요. 이처럼 남성미 물씬 풍기는 캐릭터로 신작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덧 2) 케이트 블랑쳇의 히스테리컬한 연기도 매력적입니다. 피가 나도록 양치질을 하는 장면은 왠지 소름끼칩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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