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는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언뜻 봐도 가냘픈 체구의 소녀가 순록을 쫓고 있습니다. 이윽고 한 발의 화살을 맞은 순록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지고, 소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배를 가릅니다. 그 와중에 한 남자가 소녀의 뒤로 몰래 다가와서 말합니다. "넌 지금 이 순간에 죽었어". 그의 말은 단 한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고, 두 사람은 이내 실전 훈련으로 보이는 격렬한 육탄전을 벌입니다. 이 격투가 끝나고 나면 서로 죽일 듯이 싸운 소녀와 남자가 부녀지간임을 알게 됩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나는 아버지와 함께 핀란드의 이름 모를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녀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에서 훈련을 하며 아버지와 백과사전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한나는 5개 국어 이상을 할 줄 아는 영리한 살인병기로 자라났습니다. 한창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뛰어놀 나이임에도 아버지에 의해 냉혹한 킬러로 자라난 이유는, 오래 전에 어머니를 죽인 자에게 복수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때가 됐다고 판단한 한나는 일부러 위치를 노출시켜 제 발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 피의 복수를 감행합니다.
오프닝 외에도 <한나>에는 감각적인 영상이 종종 등장합니다. 후반부에 트레일러의 공간을 감옥으로 활용한 씬을 카메라가 훑고 지나갈 때는 연극적인 요소까지 엿보이더군요.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영상과 어우러지는 음악은 기가 막힙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보다 음악에 더 끌렸는데,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역시!"라는 감탄사를 내뱉었습니다. <한나>의 음악을 빚은 이가 다름 아닌 '케미컬 브라더스'거든요. '프로디지'와 함께 일렉트로니카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듀오의 솜씨는, <트론 : 새로운 시작>의 '다프트 펑크'와 견주어도 전혀(당연히!?) 손색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영상과 음악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썩 맘에 드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조 라이트의 연출 자체는 분명 일정 수준을 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대 이상이기도 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확인하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심지어 전 그가 뮤직 비디오 감독 출신이라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그만큼 이미지를 수놓은 영상의 테크닉이 뛰어납니다. 특히 한나와 친해진 소녀가 한데 누워 속삭이면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때 카메라는 주로 클로즈업을 사용하면서 아슬아슬하고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매끄럽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시얼샤 로넌의 존재감은 <한나>가 거둔 최대의 수확입니다. 이 어린 소녀의 연기력은 예상하지 못했던 조 라이트의 영상 연출과 함께 <한나>를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시얼샤 로넌이 보여주는 10대 소녀의 심리를 드러내는 듯한 불안하고 신비한 표정은 단연 발군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안타깝습니다. 다시 한번 고민을 해봐도 <한나>는 액션도, 드라마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입니다. 물론 둘이 적절하게 섞이지도 못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대사는 묵직하지만, 곧이어 보이는 결말부의 허탈함이 <한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
덧 1) 오랜만에 본 에릭 바나는 여전히 멋있더군요. 이처럼 남성미 물씬 풍기는 캐릭터로 신작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덧 2) 케이트 블랑쳇의 히스테리컬한 연기도 매력적입니다. 피가 나도록 양치질을 하는 장면은 왠지 소름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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