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까지 어기며 혼자 <레드 라이딩 후드>를 보고 나오던 제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과 자책만이 남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영화를 봐야 하는 걸까? 얼마나 더 많은 영화를 봐야 예고편에 낚이지 않는 혜안을 가지게 되는 걸까? 내가 멍청하고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예고편 제작자의 조력(釣歷)과 내공이 내가 맞설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걸까?"

이게 무슨 말인지는 어렵지 않게 아실 수 있죠? 미국 박스 오피스 소식을 전하면서 말했다시피,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출연 때문에 <레드 라이딩 후드>는 필히 관람할 영화긴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고편을 보곤 영화에 대한 기대도 한번 해봄 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동화에서 빌어 온 이야기를 판타지로 채색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맘에 들었죠. 그걸 보면서 "과연 캐서린 하드윅이구나, '트와일라잇'에서의 노하우를 이번에 제대로 살렸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헌데 이게 웬걸요!? <레드 라이딩 후드>는 정말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는 영화였습니다.

이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차차 얘기하도록 하고, 그 전에 먼저 결론부터 다소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캐서린 하드윅은 영화보다는 뮤직 비디오를 연출하는 편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길일 듯합니다.

제목에서 풍기듯 <레드 라이딩 후드>는 그림 형제의 동화로도 알려진 빨간 모자와 늑대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이 동화에서는 할머니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려는 한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소녀에게 늑대가 접근해 행선지를 알아내고는 먼저 할머니에게 가서 잡아먹어 버리죠. 이윽고 집에 당도한 소녀도 늑대가 할머니로 변장한지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가 잡아먹힙니다. 물론 <레드 라이딩 후드>를 보기 전부터도 캐서린 하드윅이 동화를 온전히 영화화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캐서린 하드윅은 <레드 라이딩 후드>를 어떤 방식으로 전환시켰을까요?

그건 예고편만 봐도 익히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로 <빨간 모자>라는 동화의 <트와일라잇> 버전입니다. 동화도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캐서린 하드윅은 원전에서 큰 테두리만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빨간 모자의 소녀, 늑대,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 등이 그렇습니다. 이것을 제외하면 <레드 라이딩 후드>의 상당부분은 <트와일라잇>과 쏙 닮은 판타지, 미스터리, 로맨스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늑대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한풀이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알기로 '트와일라잇'에는 늑대인간이 등장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선 <레드 라이딩 후드>의 주인공은 소녀라기엔 성숙미가 절정(!)에 오른 '발레리'입니다. 그녀에게는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남자 '피터'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무꾼인 그에게 딸을 시집 보내지 않으려는 어머니는 대장장이인 '헨리'와 짝을 지어줍니다. 다시 말해서 <레드 라이딩 후드>는 발레리라는 아름다운 소녀를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꽃미남이 갈등구도를 이룹니다. 어떻습니까? 여기까지만 들어도 <트와일라잇>의 잔상을 지울 수가 없죠? 여기에 덧붙여 늑대까지 나타나니, 캐서린 하드윅이 <뉴 문>을 연출하지 못한 한풀이를 <레드 라이딩 후드>에서 토해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레드 라이딩 후드>를 보며 <트와일라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뭐 이 자체만을 두고 악영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전 동화가 현대 문학의 유전자를 이식받아 감각적인 영상으로 재탄생한다면 그 나름의 의의가 크죠. 이는 고전 동화의 재발견일 수도 있고, 재해석으로 평가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레드 라이딩 후드>에 재해석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아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건질 수 있는 건 영상뿐이요, 숫제 동화를 낭비하고 있는 편에 가깝습니다.

캐서린 하드윅이 <레드 라이딩 후드>에서 선보이는 영상미는 <트와일라잇>을 뛰어넘습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외모와 어우러진 영상은 실로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현혹적입니다. 세트와 로케이션을 오가는 배경은 또 어떻고요. 적어도 이 영화에서 촬영, 조명, 미술 등의 영상 관련 테크닉은 판타지의 그것에 버금가는 몽환적인 볼거리를 선사합니다. 이를 보며 캐서린 하드윅이 괜히 미술 감독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재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55년생, 우리나이로 55세를 넘겼음에도 어쩜 이리도 감각적인 영상을 창조하는지 경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안타깝지만 칭찬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완성도 높은 영상에 비해 <레드 라이딩 후드>의 이야기는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이 영화는 동화에다가 중세의 마녀사냥, 남녀의 삼각관계 등의 그럴듯한 소재를 버무렸지만 도통 섞이질 못합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연기한 발레리에게 내재된 코드, 즉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하는 과정에 빚어지는 욕망이나 갈등 또한 전혀 살리지 못합니다. 후자만 잘 살렸다면 차라리 청소년 관람불가의 꽤 독특한 영화로 만들 수도 있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레드 라이딩 후드>는 <트와일라잇>과 공통된 관객층을 노린 영화로 만들어져 패착이 더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레드 라이딩 후드>는 빈약한 내러티브에 스토리 텔링마저 미숙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영화는 세 남녀의 관계와 함께 늑대인간의 등장이 갈등을 더합니다. 과연 누가 늑대인간이냐는 것을 두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에 그것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죠. 사실 초반에 일찌감치 늑대인간의 정체를 밑밥으로 던집니다. 그걸 보면서 "설마 아니겠지, 뭔가 함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끝까지 집중한다면 크게 낭패를 봅니다. <레드 라이딩 후드>는 정말 허탈하기 짝이 없을 만큼 한치도 어긋나지 않는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것까진 좋습니다. 반전이든 아니든 어떻게 끝이 나는가는 둘째 치고, 최소한 그렇게 인물을 드러냈다면 그 외의 것으로 관객의 흥미를 잡아둘 수 있어야 하는데 <레드 라이딩 후드>는 그러질 못합니다. 발레리와 피터, 헨리가 이루는 러브 라인의 갈등도 싱겁기 짝이 없고, 이것을 사이에 두고 펼치는 '늑대인간 찾기'도 시종일관 공갈로 일관하는 헛다리 짚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미약한 가능성에 기댔던 결말이 현실로 다가와 제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에 허탈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그나마 <트와일라잇>은 원작이 지대한 공을 세웠음이 틀림없습니다.

★★★

덧 1) 위의 별점은 지극히 아만다 사이프리드 때문에 후하게 준 것입니다. 아...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그냥 섹시한 것을 넘어서 뇌쇄적이고 관능적인 미가 철철 넘칩니다. 메간 폭스 같은 스타일보다는 이쪽이 남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타입이죠.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최소 5할은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캐스팅한 것이 살렸습니다.

덧 2) 영화를 보고 나서야 'IMDB'와 '로튼 토마토' 등의 관객 평점을 봤습니다. 일찌감치 확인하고 갈 걸 그랬습니다.

덧 3) 빌리 버크는 <트와일라잇>에 이어 <레드 라이딩 후드>에서도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로 출연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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