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 본 글에서는 왕족의 인명을 즉위 후의 것으로 통일하였습니다.

<킹스 스피치>를 보기까지 참으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영화의 무대인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개봉한 지 16주 이상이 지났는데 말입니다. 대충 살펴보니 어지간한 국가들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가장 늦게 개봉한 축에 끼더군요. 배급사의 의도에는 어떤 계산이 깔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으며 이해도 합니다만, <킹스 스피치>의 개봉을 이렇게나 미루는 것이 적절한 판단인지는 의문입니다. 불법 다운로드는 차치하더라도 해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영향력에 기대려는 행태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바꿔 말해서 수상을 못했다면 개봉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일 테니까요.

각설하고, <킹스 스피치>는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6세에 얽힌 일화를 다룬 드라마입니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의 주요 부문을 모두 휩쓴 영화죠. 이러한 결과를 두고 나오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이변이다"와 "당연한 결과다". 전자에 속하는 의견은 다분히 <소셜 네트워크>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공개 직후부터 평론가들의 극찬 세례를 받았던 영화를 꺾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문제제기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후자에 속하는 의견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특성과 아카데미 위원회의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킹스 스피치>는 '드라마'입니다. 시원하게 깨부수는 현란한 '액션'이 아니고, 눈부신 시각효과와 스케일을 자랑하는 'SF'가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의 모험극을 담은 '판타지'도 아닙니다. 여기서 드라마라는 장르의 정의를 내리기는 좀 애매모호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드라마는 특정사건을 활용하거나 부각시키기보다는, 등장인물의 인간미가 드러나는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카데미 위원회가 드라마를 선호한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들이 달리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듣는 게 아니죠.

최근 10년간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만 봐도 절반이 드라마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크래쉬, 밀리언 달러 베이비, 뷰티풀 마인드, 아메리칸 뷰티>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조금 더 폭을 넓히면 거의 대부분이 드라마의 인자를 갖고 있습니다. 2004년에 이례적으로 아카데미를 석권한 <반지의 제왕> 정도가 예외일까요? 그만큼 아카데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영화에 애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드라마라도 <킹스 스피치>가 <소셜 네트워크>를 꺾은 건 바로 그 드라마틱한 면에서 보다 아카데미의 취향에 부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킹스 스피치>의 작품상 수상이 유력해졌을 때 다소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셜 네트워크>의 수상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관람한 <소셜 네트워크>는 평론가들의 극찬을 들을 만큼 훌륭한 영화로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완성도가 뛰어난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감히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고 판단했죠. 반면 관람하지 못한 <킹스 스피치>는 어차피 드라마일 테니 답이 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했다시피 <킹스 스피치>가 수상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뿐이었죠. 그 밖에도 연기상의 치열한 경합에 비해 작품상의 후보는 엇비슷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킹스 스피치>를 보면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과연 전통적인 아카데미의 취향에 고스란히 맞춘 영화냐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야 뭐 전문가도 아니고 평론가는 더더욱 아닙니다만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내세울 권리쯤은 있잖아요? 제아무리 여기저기서 떠받들어도 본인이 그 가치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확실히 주관을 피력할 수 있는 편이 차라리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차서 어쭙잖은 지식인 흉내나 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무분별한 비난을 배설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그래서 <킹스 스피치>는 어땠냐고요? 보기 전이나 후나 여전히 이 영화가 아카데미의 취향에 따른 이점을 누렸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기존의 영화가 갖췄던 공식을 안이하게 답습하는 무성의함은 보이지 않았고 나름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선 <킹스 스피치>는 영국의 고귀한 왕족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거기에 침잠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막장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대리만족의 기술도, 노골적이든 아니든 비판 또한 거의 엿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왕실에 대한 풍자로 유머감각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는 극의 활기를 더해주는 양념으로 더 어울립니다.

대신에 <킹스 스피치>는 주인공인 조지 6세라는 한 '인간'의 내면에 보다 집중합니다. 물론 조지 6세의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하는 데 그의 태생적인 신분을 외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더더욱이 <킹스 스피치>라면 그 점을 외면하고서는 지금의 정체성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말을 더듬는 원인을 신체가 아닌 심리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가 대상이라도 인간이 가지는 심리적인 문제점의 근원을 찾으려면 자라온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에 말을 심하게 더듬는 친구가 있었던 제게는 이것이 꽤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혼잣말을 할 때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거나, 노래도 더듬지 않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놀랍기도 했습니다.

<킹스 스피치>가 이야기에 왕실의 개입을 최소화한 것은 현명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선택은 왕실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영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도 흥행이 호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조지 6세를 '왕족'으로서가 아닌 결함을 가진 '인간'으로 다루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훨씬 더 보편적인 차원의 소재로 폭을 넓힌 것이 주효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왕실을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으며 적재적소에서 두 차원의 조지 6세를 혼합하고 있는 것이 꽤 큰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은 라이오넬이 거의 전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말을 더듬는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고용된 라이오넬은 자신이 가르쳐야 할 대상이 왕자임을 알고서도 종래의 수업방식을 고수합니다. 그는 감히 왕족의 청을 거절하고 반드시 자신의 사무실로 와야만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 동등한 입장에 서야 한다면서 가족에게만 허용된 왕자의 애칭을 사용합니다. 당연히 조지 6세는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가지지만 그를 신뢰하게 되면서 차차 인간적으로 가까워집니다. 이에는 조지 5세의 죽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조지 6세와 라이오넬이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꽤 흥미롭습니다. 엘리자베스 왕비의 주선으로 만난 두 사람은 앞서 언급한 화제로 인해 팽팽하게 대립합니다. 일개 언어 치료사인 주제에 애칭을 부르다 못해 왕족의 사생활까지 파헤치려고 하니 발끈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반면에 라이오넬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지 6세의 증상이 분명 심리적인 요인에 근거했을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하지만 왕족이 사생활을 쉬이 드러낼 리 만무한 탓에 둘은 좀처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헤어집니다. 조지 6세는 격노하기까지 하죠.

이때 정말 흥미로운 것은 라이오넬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을 믿지 않고 나가려는 조지 6세를 결코 붙잡지 않습니다. 타이르지조차 않지만 오히려 나중에 제 발로 찾아오게끔 만들죠. 이건 라이오넬이 조지 6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를 굴복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킹스 스피치>에서 묘사되는 것만 보면 라이오넬은 굉장히 영리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첫 만남에서 테스트에 응하지 않으려는 조지 6세의 기질을 건드려 그가 반응하게 유도하는 방식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시작이 좋지 않았던 조지 6세와 라이오넬의 관계는 화면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마주하되 꽤 거리를 두고 앉는 것이나, 시종일관 두 사람의 바스트 샷이나 클로즈 업을 잡을 때 상당한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 그렇습니다. 이는 아마도 화면에 드러난 물리적인 여백만큼이나 둘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에는 간극이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거리가 좁아지게 되는 시점이 바로 조지 5세의 서거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슬픔을 표현할 수 없던 왕족인 조지 6세는, 홀로 비탄에 빠지는 대신에 통보도 하지 않고 라이오넬을 찾아갑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친밀하게 인간적인 교류를 나눕니다. 수업시간을 제하고는 처음으로 근접한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로 앉았으며,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의 요구가 있기도 전에 자신의 사생활을 읊어대죠. 이 과정에서 라이오넬은 조지 6세의 증상이 유년시절에 겪었던 심리적, 육체적 억압에 기인했음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 이후에도 둘의 화면에는 전보다 훨씬 적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여백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조지 6세와 라이오넬이 절대 공유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신분차를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말부에 가면 이 여백이 거의 사라집니다) 아울러 광각렌즈를 활용한 공간의 왜곡과 부감 샷은 조지 6세의 처지, 즉 고립과 중압감 그리고 고독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톰 후퍼가 보여준 <킹스 스피치>에서의 연출력은, 글쎄요... 분명 뛰어나긴 하지만 쟁쟁한 감독들을 물리치고 수상할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구심이 듭니다. 전체적으로 작위적이지 않게 보이도록 하면서 담백한 연출을 유지한 것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뻔한 드라마였다면 질색했을 저조차도 필요 이상으로 절제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베토벤 7번 교향곡과 어우러진 결말부의 호소력은 이전의 연출과 궤를 같이 하려다 보니 조금 미약하지 않았나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감독상만큼은 <소셜 네트워크>의 데이빗 핀처에게 돌아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를 연기한 콜린 퍼스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는 다혈질이면서도 소심한 말더듬이 왕의 변화를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작품상의 수상이 그러하듯 남우주연상도 아카데미의 취향에 따라 예견된 것이기도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아무나 움켜쥘 수는 없습니다. 오직 준비된 자만이 가능하죠. 한편으론 올해의 남우주연상은 누가 받더라도 타당한 결과고, 동시에 후보에 머무른 배우들의 명연이 안타깝습니다. 조역에 충실한 제프리 러쉬 또한 훌륭합니다. <킹스 스피치>에서 그의 연기는 마치 힘은 적지만 백사장에 흔적을 남기는 잔잔한 파도와도 같습니다.

덧 ) 조지 6세의 형인 에드워드 8세는 <킹스 스피치>에서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현실에선 세기의 로맨스니 뭐니 하면서 더 돋보이기까지 하는데 말입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렇게 묘사했었죠. 실제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조명하진 않고 그 부분만 지나치게 미화해서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들더군요. 더 가관인 게 뭔지 아십니까? <킹스 스피치>의 개봉을 앞두고 같은 프로그램에서 조지 6세를 소개하며 에드워드 8세의 행적도 잠시 다뤘습니다. 과연 이전에 세기의 로맨스 운운하며 소개할 때는 그와 부인의 친나치 행적을 프로그램 관계자들이 몰랐을까요? 알면서도 외면하고 로맨스의 미화에만 집중했다는 것에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는 조지 6세를 부각시키고자 에드워드 8세의 치부와 대비시키다니... 뭐랄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촌극으로 보였습니다. "어차피 예능이다"라는 말을 면죄부로 삼으려고 하지는 마세요. 특정한 목적하에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행위는 결코 올바르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로맨스조차도 그토록 아름답진 않았죠. <킹스 스피치>에서 언급되듯이 에드워드 8세의 부인인 월리스 심슨의 사생활은 굉장히 문란했고, 주영 독일대사와의 관계 또한 기정사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단지 영국 왕실에서 그놈의 권위 때문에 덮으려고 안간힘을 썼을 뿐이죠. 친나치였음이 만천하에 공개된 후에도 윈저성에 안치한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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