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도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 안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지, 또 다른 장치나 음흉하고 뻔뻔한 속셈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환멸을 느끼며 바라봅니다. 갑자기 줄줄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오는 연예인들의 스캔들에도,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일어난 끔찍하고 안타까운 자연 재해에도, 그리고 점점 조용히 사라지는 것처럼 줄어드는 관련 기사에도 여러 네티즌과 대중들의 의혹과 의심, 불신은 사라질 줄 모릅니다. 아무 것도, 어떤 것도 해결되지도, 해결할 생각도 없이 묻히고만 있는 한 여인의 고통과 아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요.

장자연.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연기자였던 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스스로 안타까운 선택을 한 이후 이렇게나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는 당연합니다. 그녀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까닭. 그 속에는 단순히 한 개인의 슬픔과 고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 외면하고도 싶고 아닌 척하고도 싶은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절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 6일 SBS는 고 장자연 씨가"유력인사 31명에게 100여 차례의 성 접대를 했다"는 내용이 담긴 50여 통의 자필 편지가 존재한다고 보도했다.
화려한 외모와 재능을 가진 수많은 지망생들이 있지만 결코 모두가 얻을 수는 없는 ‘스타’의 자리를 위해 지금도 고생하고 달려들고 있는 청춘남녀들. 그리고 이들의 힘겨운 현실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달려드는 주위의 추악한 무리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형의 이들이 몰려 있는 곳에 당연히 돈과 욕망이 꼬이기 마련이고 이런 어두운 이면의 일부가 그녀의 죽음으로 살짝 밖으로 노출된 것이죠.

하지만 이 슬픈 사건은 단순히 연예계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주의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지위와 부를 이용해 점점 더 괴리된 탐욕과 특권을 전횡하는 전혀 공정하지 못한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진실과 경고를 해주어야 할 언론, 이런 잘못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정죄해야 할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혐오. 고 장자연 사건을 통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징후와 해결 방식들은 환멸이 나고 짜증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드라마 속에서 재벌들과 사회 지도층들의 문란하고 꼴시러운 행태를 묘사하며 이것이 그들의 실상이라고 조롱하듯 보여주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없다며 시치미 떼고 있는,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행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세기의 스캔들이니, 솔직한 연인 공개니 하는 어떤 다른 자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고 해도 이런 일련의 발표나 공개들이 자신들의 더러운 치부들을 덮기 위한 포장으로 밖에는 보이질 않고, 아무리 여러 수사기관들이 근거를 제시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중들을 설득하려 해도 그 결과에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존재하는데 가해자들에 대한 언급과 처벌이 보이기는커녕 정당한 조사나 검토는 전혀 발견할 수 없거든요. 오히려 가해자로 의심받는 이들이 떵떵거리며 손가락질 한 사람들을 고소하고, 그들이 법정으로 끌려다니는 풍경을 보며 누가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가, 납득할 수가 있을까요.

▲ 16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양후열 문서영상과장이 '장자연 편지'가 고 장자연씨 필적과는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국과수는 지난 9일부터 경찰이 전모(31)씨에게 압수한 장씨 편지라는 원본 24장 등에 대한 필적과 지문감정을 해왔다. 화면의 '적색필적'은 광주교도소에서 전모씨로부터 압수한 필적이다.ⓒ연합뉴스
발표되지 않은 친필 편지들이 존재한다는 SBS의 보도로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이 사건의 파장은 국과수의 필적 위조 판정으로 또 다시 수많은 사회지도층들에게 면죄부를 주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그녀가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아픔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가해자들은 과연 누구이고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인지에 대한 어떤 해명도, 설명도 없이 그저 그 편지는 가짜이니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고인과 가족들의 명예와 아픔만 실컷 헤집고 끝난,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것 외엔 의미가 없는 수사결과였어요.

하지만 이 해결되지 않은, 그리고 도통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의심, 그리고 절망은 지금 우리의 목에 걸려 있는 아픈 가시입니다. 이번에도 어떻게 잘 넘겼다고, 그냥 이런 식으로 쭉 모른 척, 아닌 척 넘어가버린다면 분명 분노의 유통기한이 짧은 대한민국에서 장자연의 이름은 또 다시 기억 저편에서 조용히 잊혀질 겁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우리가 느낀 분노와 절망, 그 아픈 감정에 대한 기억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아무도,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만든 책임은 반드시 더 큰 무서운 책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라도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 답답한 현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갑자기 추어진 날씨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마음이 서늘한 하루네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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