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 권투로 일어서는 가족주의 ★★★★

한때 우리나라에서 권투가 축구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시절이 있습니다. 당시에 홍수환, 박종팔, 문성길, 장정구, 유명우 등의 선수는 박지성, 이청용, 기성용에 못지않은 유명세를 떨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봐도 권투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저만 해도 우리나라에 현재 세계 챔피언이 몇 명이나 있는지, 있긴 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격변하는 세상에 발맞춰 스포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취향도 변하는 걸까요? 이제는 권투보다 물리적으로 더 치열하고 강렬한 이종 격투기가 그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최요삼 선수의 사망으로 권투의 잔인함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진부한 표현임에도 사실 권투만큼 인간적이고 인생을 닮은 스포츠도 없습니다. 혼자서 글러브 하나만 끼고 링에 올라 누군가와 마주하여 그와 경쟁하고 투쟁한 끝에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은,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에 늘 다른 이와의 경쟁을 일삼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과 같습니다. 이를테면 인생은 신이 만들어놓은 링에서 펼치는 지독히도 처절하고 잔인한 경기인 셈이죠. 그래도 권투처럼 누군가를 죽이진 않는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꼭 육체적으로 짓밟는 것만이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은 아닙니다.

아무튼 과거에 권투가 큰 인기를 얻었던 것도 앞서 말한 닮은꼴의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에 지금은 권투나 이종 격투기가 예전만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이 점점 더 결과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집착하면서, 정당한 경쟁을 통해 승부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영화사를 통틀어서 가장 많이 소재로 쓰인 스포츠 중의 하나가 권투일 것입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걸작 <성난 황소>,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안겨준 <록키>, 이색적으로 여성 권투선수가 등장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권투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알리> 등등. 이처럼 권투와 권투선수를 재조명한 일련의 영화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같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죠. 이는 대다수의 권투영화가 실존인물과 실화에 바탕을 뒀음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역시 권투 자체가 가진 특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했다시피 권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이미 허다합니다. 게다가 다들 감동을 수반한 인간승리를 앞세운 것도 확연한데, 여기 또 한 편의 권투영화가 등장했습니다. 여타 유수 영화제와 함께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남녀조연상을 휩쓴 <파이터>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영화는 다른 권투영화가 그렇듯이 실제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활약했던 미키 워드의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단 권투영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실화를 모티브로 삼는 데는 딱 한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가상으로 꾸며내는 것이 아닌 실화이기에 더욱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파이터> 또한 동일한 배경에서 출발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주인공인 미키 워드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로 영화에서 나타나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갱으로 등장합니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타운>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파이터>의 미키 워드는 권투선수입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전적을 가진 선수는 아니고, 잘 나가는 선수들이 쉬어가는 의미에서 가지는 경기에 오르는 불품 없는 선수입니다. 그런 그가 한 여인을 만나기 시작할 즈음부터 삶을 바로잡으며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다만 오해는 마세요. <파이터>는 멜로가 강조되거나 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파이터>는 그보다 조금은 특이한 영화입니다. 권투영화가 어떠하리란 예상쯤은 이제 관객들도 다 하고, 제작진 또한 그걸 모를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다면 관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른 권투영화와는 뭔가 차별화를 할 수 있어야 하겠죠. 감동의 파고만 아무리 드높인다 한들 관객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범작에 그치면서 외면 받고 말 겁니다. 데이비드 러셀 감독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덕분일까요? <파이터>는 권투영화가 아닌 권투영화로 관객들과 마주 섰습니다. 말장난 같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영화는 권투영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파이터>는 온전히 미키 워드의 개인사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를 둘러싼 이들, 즉 가족사를 극의 중심에 놓고 전개해 나갑니다. 우선 미키 워드에게는 아버지가 다른 형인 디키 에클룬드가 있습니다. 그 역시도 왕년에 촉망받던 권투선수였지만 지금은 마약중독자에 불과한 신세입니다. 복귀를 하겠답시고 설레발을 치지만 연습은커녕 계집질에, 그것도 모자라 마약이나 빨아대는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유명한 슈가 레이 러너드를 한번 다운시켰다는 걸로 으스대기나 합니다. (심지어 그 다운은 아무리 봐도 슬립 다운입니다) 이것뿐이면 다행인데 미키의 연습도 제대로 도와주지 않고 경기장으로 떠나야 할 시각까지 말썽을 부리는 진상입니다.

디키를 이어 어머니인 앨리스도 한번 볼까요? 두 아들을 비롯하여 무려 아홉 명의 자녀를 거느린 앨리스는 미키의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본인은 미키를 사랑한다 말하고, 진심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어째 사업수완은 영 엉망입니다. 사실 데이비드 러셀 감독이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돈 때문에 아들을 부당한 경기에 출전시켰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위한답시고 하는 행동들은 죄다 미키의 발목을 잡아서 앞길을 가로막는 꼴입니다. 이런 앨리스가 언제나 명분으로 내세우는 건 "가족이 우선이다, 믿을 건 가족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명분에 얽매였던 미키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샬린을 만나면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뛰고자 가족을 멀리합니다. 미키는 디키의 트레이닝도, 어머니의 매니징도 거절하면서 자신을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섭니다. 그 결과로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타이틀 매치의 무대에 오르게 되지만, <파이터>는 결국 종국에 가족들간의 화합으로 귀결됩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인간승리가 아니라 다시 우뚝 일어서는 가족주의의 조형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파이터>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폭넓은 관객층을 확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시각의 차이야 있겠지만 폭력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권투를 상당부분 감쇠하고, 보다 보편적인 온화한 가족주의를 내세운 것은 <파이터>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아무래도 남성관객에게는 화끈한 권투경기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아쉬움의 대상이겠죠. <파이터>에서의 권투는 일종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으니 행여라도 <록키>를 기대하시는 것은 금물입니다. 아울러 역경을 딛고 분연히 일어서는 휴먼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닌 관계로 감동이 폭풍처럼 쏟아지는 편도 아닙니다.

데이비드 러셀 감독의 연출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날렵한 권투선수의 풋워크를 보는 듯 리드미컬한 전개는 훌륭했습니다. 다소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만큼 권투에 집중하지 않은 것도 좋았지만, 그것을 희생하면서 구축한 가족주의가 과연 얼마나 잘 표현됐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미키에게 은연중에 희생을 강요하고 발목을 잡는 그릇된 가족의 단면을 묘사한 것은 딱히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갈등을 폭발시키고 해소하는 과정을 지나치게 간략화하고 덤덤하게 그린 것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덧 1) 디키 에클룬드가 권투선수였다는 것은 알았지만 슈가 레이 레너드와도 대전했었다는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역시 레너드가 넘어지는 장면은 녹 다운이 아니라 슬립 다운으로 보이더군요.

덧 2) 이미 소개가 많이 됐지만 미키 워드는 <파이터>에서 다뤄지지 않은 경기로 더욱 유명합니다. 마지막에 타이틀 매치를 벌이던 쉐어 니어리가 "가티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난다"라는 투로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말한 가티가 후에 미키 워드와의 전설적인 3연전을 권투역사에 아로새긴 아투로 가티입니다. 유튜브에 영상이 있으니 한번 보세요. 난타전도 그런 난타전이 없습니다. 동일 라운드에서도 전세가 몇 번이나 역전되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덧 3) 명경기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스카 델라 호야 대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의 경기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티비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죠. "우와~ 만화에서나 볼 줄 알았던 경기가 실제로도 가능하네?"

덧4) 극 중에 몇 번 흘러나오고 미키가 테마로도 사용한 화이트 스네이크의 'Here I go again'이 귀에 착착 감겼습니다.

덧 5) 크리스찬 베일의 머저리(?) 연기는 명불허전입니다. 외모까지 당시의 디키 에클룬드와 쏙 닯았더군요. 다만 이제 몸을 혹사시키는 연기는 자제했으면 좋겠어요.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찍으려면 또 다시 몸무게를 불려야 할 텐데...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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