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엉뚱할 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소녀' 노다메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년' 치아키의 만남이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티비판이 방영된 것이 2006년의 일이라니 거의 4년이 걸렸군요. 길다면 길지만 노다메 덕분에 그동안의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기에 아쉬움이 앞서네요. (사실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은 일본에서 개봉한 지 한참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흘러서야 고작 전편이 극장에 걸렸지만...)

이야기는 전편에서 그대로 이어집니다. 파리로 함께 유학을 옴으로 인해 노다메는 치아키의 곁에 있게 됐습니다. 동시에 그에게 걸맞은 짝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편의 결말부에서 노다메는 치아키의 성공적인 무대를 보며 기뻐하긴커녕 분해하면서 비탄에 빠집니다.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생각했지만 치아키는 다시 두 걸음을 더 앞서나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절망에 빠진 것도 잠시, 노다메는 치아키와 별안간 찾아온 일본의 친구들을 통해 기력을 회복합니다.

한편 키요라가 출전한 콩쿨에 방문했다가 노다메는 치아키와 협연하고 싶은 곡을 발견합니다. 바로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사장조. 뛸 듯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다메가 연주를 시작하자, 치아키는 이 곡을 들으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맙니다. 하필 노다메가 경쟁의식을 갖고 있던 루이와 함께 며칠 후에 협연하기로 한 곡이었습니다.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노다메는 또 한번 실의에 빠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던, 만화를 원작으로 한 티비판의 성공 이후에는 애니메이션이 제작됐습니다. 게다가 시리즈로! 이후에는 외전격으로 역시 만화를 원작으로 한 <노다메 칸타빌레 인 유럽>이 두 편으로 나뉘어 방송됐습니다. 거기에 극장판까지 더해졌으니, 원작을 보지 못한 저로서는 일본의 전형적인 '우려먹기' 전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적어도 극장판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아니, 1편을 관람하고 나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을 보고 나서 제 판단이 아주 경솔하고 섣부른 것이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티비판의 실질적인 중심은 치아키였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던 그에게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기고 노다메와 짝을 지어줌으로써 타인과 화합하는 과정을 그렸던 것입니다. 저마다의 화음을 내는 각기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을 조율하여 하나의 곡으로 완성하듯, 치아키도 서서히 '관계의 의미'를 찾아갔습니다. 이를테면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에서 따스한 인간미를 소유하게 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티비판을 치아키의 성장기라고 한다면 극장판은 노다메의 성장기입니다. 그렇기에 이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이야말로 시리즈 전체의 화룡점정이 되어주는 완결편의 역할을 합니다.

전편의 경우엔 중반부까지 여전히 치아키의 고난이 이어졌습니다. 그는 재정문제가 시발점이 되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말레 오케스트라를 맡게 되면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치아키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그러면서 후반부에 이르러 스포트라이트는 자연스레 노다메에게로 옮겨갔습니다. 치아키의 능력에 맞추고자 자신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느새 더 멀어져버린 그를 보면서 노다메는 분루를 삼켜야만 했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에서는 노다메가 회복이 힘들 정도의 심리적 타격을 입습니다. 전편에서 한 차례 기가 꺾였던 그녀는 루이에게 필사의 곡을 빼앗기다 못해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연주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치아키와의 협연에서 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노다메는 한계를 절감하고, 그나마 갖고 있던 자신감마저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자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의 연주를 들려줄 수 없다고 체념하면서...

사실 파리로 온 이후에 노다메는 항상 조바심에 시달렸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치아키의 짝으로 어울리는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치아키가 실망하고 떠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동시에 노다메의 족쇄가 되어 이상형으로 성장하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당장 자신 앞에 놓여있는 벽을 넘기보다는 저 멀리 떨어진 벽을 넘을 생각만 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성장이 이뤄질 리가 없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성장과정과도 같습니다. 어릴 적에 우린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랍니다. 특별한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육체의 노화를 강제해서라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어른이 되겠다는 바람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른 건 그대로인데 육체만 어른이 되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중간과정을 생략한 탓에 현실의 모진풍파를 견딜 내공이 전무해 더욱 괴로울 뿐입니다. 관록이니 연륜이니 하는 인생사의 경지는 그냥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 또한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삶이란 참 오묘하죠?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입니다만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은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습니다. 노다메로 하여금 좌절하게 만든 원인이 치아키라면, 다시 그 좌절을 딛고 일어서게 만들 수 있는 사람 또한 치아키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치에요. 그에게 노다메가 있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조화'를 체득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도 노다메에게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치아키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면 더욱이 그래야 합니다. 노다메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연주 이전에 치아키의 옆에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니까요!

이들을 지켜보는 것이 참으로 흐뭇하고 부러웠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를 언급하며 몇 차례 말했듯이 노다메와 치아키는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이상적인 커플입니다. 예전의 치아키였다면 꿈도 꿀 수 없지만, 누군가와 삶을 공유한다는 것의 의미와 행복을 알게 된 그는 끊임없이 노다메를 독려합니다.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상대라 여기며 무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너 따위의 재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연주 같은 건 할 수 없어"라며 자격지심의 끝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진심을 헤아리고 용기를 심어주고자 지원합니다. 다시 말해 시리즈 전체를 지나오면서 노다메와 치아키는 서로가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줬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커플입니까?

그렇게 노다메와 치아키는 또 한 단계 성장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아마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이 없었다면 극장판의 의미는 상당히 퇴색됐을 겁니다. 관람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그랬지만 지금의 판단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이야말로 시리즈 전체의 엔딩으로 제격입니다. 후반부에 급물살을 타면서 내러티브의 묘사가 좀 부족하지만, 티비판을 시청하신 분이라면 마지막 '아름다운 협주곡'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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