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관(下棺), 어떤 삶이 마침표를 찍는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가 이 나라에 ‘리영희’란 이름을 들고 방문해 준 것은 눈 먼 우리에게 엄숙한 축복이었다.

▲ 지난 12월8일 땅이 울고, 사람이 울고, 하늘이 울었다. ⓒ정상철 광주드림 기자 제공
지난 12월8일이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흔치 않은 겨울비가 제법 굵게 내렸다. 땅이 울고, 사람이 울고, 하늘이 울었다. 그 날 우리의 오랜 눈이었던 선생이 국립 5·18 민주묘지에 오월의 영혼들과 함께 영영 눈을 감았다. 선생의 하관식은 선생이 지나온 길처럼 넓고 묵직했다. “화장한 뒤 광주에 묻어 달라”던 유언, 그 마지막 말이 내내 마음에 밟혔다.

리영희, 그가 묻히던 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길을 잃은 느낌이었고, 잠시 세상이 더 어둡게 보였다. 그가 없는 세상이 많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가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들, 평생의 삶으로 보여준 신념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엮는 단어는 ‘개안’이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줬다. 분명 그가 보여준 세상은 달랐다. 모두가 눈앞의 것만을 믿던 때 그는 권력의 내부를 파고들어 지식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증명했다. 많은 기자들이 권력과 서로 내통하며 주류로 편입되는 동안 그는 묵묵히 시대의 양심을 썼다.

근데 우리는 선생에게 무엇을 줬던가? 아무것도 되갚아 준 것이 없는데 선생이 불쑥 가졌다. 어깨에, 다리에, 심장에 힘이 풀린다.

▲ 선생의 하관식은 선생이 지나온 길처럼 넓고 묵직했다. ⓒ정상철 광주드림 기자 제공
눈빛에 서늘한 의식을 담고 있었던 사람, 시대의 지식인으로 불렸던 사람, 먼발치에서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경외를 느끼게 했던 사람, 리영희. 개인의 편안함 대신 권력과의 전면전을 선택했던 선생의 삶은 고난과의 동거였다. 개인 경제는 청계천 미나리꽝 근처의 낡은 집을 벗어나지 못했고, 차가운 감옥 안에 삶을 저당 잡혀야 했던 시간이 길었다.

그리하여 선생의 글은 세상을 눈뜨게 했다. 모두가 미국의 허위 속에 살던 시절, 선생은 케네디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용인해주는 대가로 베트남 참전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는 기사를 썼다. 모든 신문이 휴전선 저쪽의 나라를 ‘북괴’라고 표현하던 때, 그는 ‘북한’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기사 안에 들여왔다. 선생의 기사를, 책들을 읽으며 우리는 삶의 길을 찾았다. 그의 책 ‘전환 시대의 논리’는 대한민국을 바꾼 저서의 목록 안에 있다. 단언컨대 시대의 허위는 선생의 냉철한 의식 앞에서 무력했다.

선생은 갔고, 이제 우리가 남았다. 돌아보면 선생은 삶은 미국의 진짜 얼굴을 알리는 역할이었다. 선생은 이 나라에서 미국이 점령군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 오랜 시간을 싸웠다. 그것은 인식과의 싸움이었고, 자기 이익에만 몰입해 국민을 뒤에 두는 권력과의 치열한 사투였다. 왜 미국이었을까?

선생은 말했다. “모든 부패의 근원이 미국이야. 저들은 남북관계의 긴장으로 50년을 해먹는 거야. 한때는 위기이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국민들이 지금도 그런가하는 의구심을 한 번쯤 가져보면 되는데 50년 동안 믿어왔던 대로 그냥 믿는 거야. 사실 미국이 이 나라에 아직도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북한을 겨냥한 게 아니라 앞으로 강대해질 중국과의 냉전에 대비하는 거야. 근데 우리는 미국에게 무조건 있어 주라 하고 돈을 갖다 바치지. 심각한 자기상실이야.”

▲ ⓒ정상철 광주드림 기자 제공
꼭 한 번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선생의 치열한 싸움의 이유에 대해 물었고, 선생은 답했다. 위대한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 평범했다. 단지 “그냥 인간”이고 싶었다는 선생의 말에서 나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평범의 깊이’를 느꼈다. 다시 그 평범함을 떠올린다. 거기, 남은 우리의 길이 있다.

“인간은 힘이 미약해. 거짓과 폭력으로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소외된 인간일 수밖에 없어. 근데 나는 소외된 인간으로 살고 싶진 않았어. 만약 내가 폭압의 희생자가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그냥 인간이고 싶었거든. 사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고 살아온 게 아니라 내가 본 진실에 충실했던 것뿐이야.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거짓논리에 승복할 수 없었던 거지.”

2010년 12월8일, 리영희 선생은 광주에 묻혔다. 거짓을 덮었다. 비는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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