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은 은근히 사회 비판의식이 강한 드라마이다. 김혜수, 황신혜 정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신성우라 그렇지 좀 더 존재감 강한 남자 배우가 했다면 그를 둘러싼 사학 비리의 현실이 시청자에게 훨씬 더 절실하게 전달됐을 것이다. 신성우가 시쳇말로 미친 존재감을 발휘했다면 드라마 시청률은 물론이고 작가가 고발하고 싶은 대학사회의 추악한 비리와 모순에 대해 더 많은 공감을 끌어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미스터리를 만드는 것에 반신반의했지만 그래도 드라마 질적인 면에서는 동시간대 다른 드라마들보다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 비판으로 시작해서 시청자를 끌어다 놓고는 애먼 물타기로 변질되어가는 대물보다는 언론도 쉽사리 손대지 못하는 대학교수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뚝심에는 공감과 존경심을 갖게 된다. 제자 논문 베끼기, 연구비 횡령 등 즐나집은 교수사회에 대해 직격탄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뚝심과 달리 그 의도는 쉽사리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신성우의 동서가 술상 밑을 기어서 탁경환 학과장의 벌어진 사타구니로 얼굴을 내밀고 술잔을 내미는 충격적인 장면까지도 동원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이제 그만 비리나 모순에 대한 관심도가 적어진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충격적인 묘사에 무덤덤한 것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즐나집은 성은필 대학 이사장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작되고, 그 범인을 쫓아가는 구도 안에 김혜수, 황신혜 두 여자의 심리적 갈등의 디테일로 장식되는 드라마이다. 그 커다란 그림 안에는 김갑수, 황신혜 부부 그리고 신성우 김혜수 부부의 문제와 함께 재산 상속과 아직 밝혀지지 않은 소위 부잣집의 치명적인 도덕적 문제까지 다룰 예정으로 보인다. 부부 문제야 드라마에서 이미 닳고 닳은 이슈지만 나머지 모티브들은 상당히 신선한 재료들이다.

다만 문제는 그 싱싱한 재료들이 드라마라는 냄비 안에서 제대로 끓어줘야 하는데 정작 찌개가 돼서는 그 맛과 향을 잃고 마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 싶어 나름 고민해봤지만 원인은 배우에게 있었다. 신성우는 그 동안 죽은 성은필의 누이인 윤여정의 용의선상에 있다. 그 때문에 김혜수의 걱정을 사고 있다. 그리고 9회 마지막 장면에서 김진서(김혜수)를 찾아간 이준희(황신혜 아버지)도 사건 현장에 신성우가 있었다는 뉘앙스를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모든 정황들을 보면 신성우는 즐나집의 핵심 중의 핵심 인물이다. 교수사회의 문제점들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양심의 아이콘이며, 저항의 주체이다. 그런 동시에 성은필 이사장의 죽음과도 직간접적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련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우가 가진 배우로서의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때로는 초라할 정도의 존재감으로 인해 그가 표현하고 상징해야 할 많은 의미들을 퇴색시키고 있다는 것이 즐나집이 잘 풀리지 못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하다못해 헌신적인 아내를 두고 모윤희와 하룻밤을 지내고 와도 욕을 먹지 않는다.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또 너무 냉정하게 설정으로만 봐도 김이 빠지는 일이다. 욕먹을 짓을 해도 욕을 먹지 않는 이 초라한 존재감이 신성우의 문제이며, 그 원인은 그의 빼어나지 못한 연기력에 있다. 그의 잘생긴 얼굴과 멋진 몸매는 오히려 그의 캐릭터를 살리는 데 불리해 보이는데다가 멋진 남자 주인공만 머리에 담은 힘들어간 연기가 어색하고, 음가를 잘 살리지 못하는 발성은 그의 저항과 고뇌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 답답하다. 이제 와서 바꿀 수도, 달라질 수도 없겠지만 즐나집이 신성우를 선택한 것은 참 안타까운 실수가 아닐까 싶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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