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조심히 다루어야 할 뿌리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혀뿌리’라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다른 두 가지 뿌리는 조금 선정적이고 남성중심적이라 거론하지 말자. 아무튼 ‘혀뿌리’를 조심하라는 어른들의 경고는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에 대한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일거다. 공인일수록, 공적인 영역에서 행하는 말 일수록 더 신중해야 하고,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상식이다. 더 나아가 가능하면 말을 다듬어 더욱 명확하고 정확하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과 실체를 드러내는 것도 공인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자 능력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공인들은 말에 대한 철학이나 책임감 그리고 능력이 거의 없다. 한 입에서 너무나 다른 주장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여기저기서 내뱉어진다. 그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 입으로 두 말하기’이자 ‘혀뿌리’ 유희의 연속이다. 또 공인의 언어적 유희에서 우리는 그 언어가 지칭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명확한 대상과 실체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공인의 ‘말’에 대한 감시와 견제, 책임성을 추궁하는 근성과 공인의 말 능력에 대한 평가 의식이 존재했다면, 공인들의 말이 이렇게까지 엉망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되거나 국민의 알 권리가 제한받아서는 결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결코 국민의 알 권리가 제한받지 않는 언론의 자유가 꽃피는 정부를 만들겠다”, “이제 관제홍보시대는 끝났다.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민간의 창의와 협조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홍보가 구현될 것이다” 등은 얼마 후면 출범하게 될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김형오 부위원장의 역설이다. 문장 그대로만 읽어주면 너무나 아름다운 말 아닌가.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미디어 정책이 이러한 철학에 기초한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조금 더 진보할 것이라는 전망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어른들의 ‘혀뿌리 조심’의 경고가 생각나는 것일까? 우선 이 말은 때와 장소, 듣는 사람들이 달라질 때마다 언제든지 달리 말해질 수 있는 것이요, 언론의 자유와 자율성, 자발적인 민간의 창의와 협조 등이 지칭하고 가리키는 구체적인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의 달성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도통 알 수 없는 말이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온갖 의혹들이 쏟아질 때, 그 의혹을 다루려고 시도했던 방송사를 협박했던 그들은 지금 같은 입으로 언론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인터넷의 자유로운 발화들을 두들겨 막겠다는 법안들을 가장 많이 제출하고 있는 그들이 언론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다. 공영방송이 마치 정부 방송인 것처럼, 또 대통령이나 언론 정책 수장의 입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 공영방송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입으로 민영화를 외쳐대면서 언론의 자유와 자율성을 운운한다. 정부로부터 언론의 자유가 진정 무엇인지도 제대로 사고해 보지 않은 그들이 정부 아닌 다른 집단(사주, 광고주 등)으로부터의 자유를 사고해 본 적이 있을까? 신문과 방송의 겸영 허용 입장을 내비치면서 자발적인 민간의 창의와 협조를 구애한다. 누구의 창의와 협조일까? 조선, 동아, 중앙, 문화, SBS의 드러난 친 이명박 언론과 조금만 도와주면 이런 저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잠재적인 친 이명박 언론인가? 이들의 창의와 협조는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게 될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공부 좀 해야겠다. 몇 가지 정치적 이해득실에 대한 판단만 가지고 때와 장소와 듣는 대상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말장난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에 담긴 철학, 정책, 입장과 실천적 방법들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하고 발화할 수 있도록 공부하길 바란다. 또 그 공부를 통해 자신의 말의 능력을 키우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다른 사람들과 소통 가능하게 하라. 소통될 수 없는 이상한 언어의 유희를 멈추는 것에서 그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1월 6일
문화연대(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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