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는 옥천군 주민들에게 무엇이었을까? 금강을 끼고 살던 사람들에게 대청호는 어떤 의미로 다가섰을까?

금강이라는 천혜의 자연을 끼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주민들은 천성이 물가에 사는 주민들이 갖고 있는 인정과 여유로움을 갖고 일생을 살았다.

그런데 수력발전을 통해 전기라는 수익을 얻고 홍수조절용 다목적댐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주민들을 잘 살게 하겠다는 정책 발표가 있었고, 대청호라는 거대한 인공호수는 옥천군민들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전기확보와 국가 기반시설 확보를 위해 국책사업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사업이 얼마나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는지, 그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했는지, 그 피해가 고스란히 주민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는지 당시는 느낄 만한 시간이나 돌아볼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1975년 충청남도 대덕군과 충청북도 청원군 사이를 막으며 시작된 대규모 다목적댐은 사람이 사는 환경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댐이 완공되면서 물은 차올랐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기 싫어도 떠나야 했다. 80년 11월30일 대청댐이 준공될 당시 1천114가구, 6천524명의 고향 잃은 수몰민이 발생했다.

▲ 대청호 전경 ⓒ옥천신문
대청댐이 만들어질 당시 옥천군 인구는 어떠했나?

1976년 옥천 인구는 10만1천110명이었다. 이 인구는 1981년 8만9천583명으로 불과 5년 동안에 1만217명이 줄었다. 아무리 농촌을 떠난 인구가 많던 시절이었어도 이런 급속한 인구 감소는 대청댐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댐이 건설될 당시 옥천 사람들은 육지 속에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지면서 호반 관광도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을 가졌다. 정부가 그렇게 선전했지만 그 기대감은 머지않아 허탈감과 분노로 바뀌었다.

수몰로 인해 변변한 보상을 받지도 못한 채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나라에서 국책사업으로 하는 중요한 일인 만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아파하거나 정권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일반 주민들이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렇게 옥천은 대청댐으로 인해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 대청호를 떠안게 되었다. 논밭을 갈 때도 길도 불편했고, 평소에는 바로 강 건너 징검다리, 세월교로 건너던 같은 마을은 거대한 호수로 변해버렸다.

1990년대 들어 환경규제가 강화되었고, 대청호 금강에 인접한 옥천 사람들은 재산권 행사나 일상생활을 하는 데까지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오죽하면 ‘대청호를 폭파’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까지 나왔을까?

기존 환경 관련 법규가 행정구역별 규제 일변도였다면 2000년대 들어 이 기조는 수계별 관리로 바뀌면서 금강수계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수질보전을 위한 노력은 강화하는 한편 상류지역 주민들을 위한 지원정책을 담게 되었다.

대청호 물을 공급받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일정한 물이용부담금을 받아 상류지역의 환경기초시설 설치, 지원대상 지역주민들의 소득증대사업, 생활환경개선사업, 육영사업을 지원하고 상수원보호구역, 수변구역 등의 토지매입비를 지원하도록 했다.

소위 주민지원사업비란 명목으로 주민들에게 일부가 직접 지원되면서 일정한 문제점이 내포되었다. 직접 지원사업비가 주민들에게 지원되면서 소모성 지원이 많아진다는 지적이 있었던 한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주민지원사업비의 일정 비율을 공동사업에 쓰도록 하는 안으로 변경되었다.

주민지원사업비를 군 장학금으로?

그리고 지난해 또 직접 지원을 받는 주민들과는 일언반구 협의도 없고, 설명회도 없이 공동사업 비율을 늘리라는 지침이 생겼고, 이에 의거해 전체 주민지원사업비 56억3천여만원 예산 가운데 5억원을 옥천군 장학금으로 출연하기로 옥천군에서 결정했다. 이는 각 읍면에 통보됐고, 대부분 읍면에서는 군에서 통보된 대로 각 읍면에 할당된 금액 만큼을 군 장학금으로 출연하는데 찬성 의견을 냈다.

딱 한 군데 안남면은 군의 결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장협의회와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 등의 의견을 모은 결과 군의 이같은 일방적인 통보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금강수계특별법에는 장학금 조성 등의 육영사업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금강수계특별법에 의해 주민들에게 배분되는 주민지원사업비이기에 성격상 대청호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고, 이를 군 전체 장학금으로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상한 결정이다. 아니 일방적인 통보다.

군 장학금으로 조성한다는 것이 어차피 옥천군민을 위한 장학사업인 만큼 논리를 갖다 대면 이상할 것이야 없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직접 피해를 입고 있는 주민들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찬성 의견으로 군에 통보된 면단위 이장들도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얘기라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사례를 보더라도 옥천군의 일방적인 행정과는 거리가 있다.

옥천군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경기도 양평군, 남양주시, 대전시 동구 등에서도 주민지원사업비를 활용해 일정 부분 장학기금을 조성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해지역 각 읍면별로 자체적인 육영사업을 벌일 뿐 시 장학회에 기금을 출연하지는 않는다.

대청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지역의 주민들이 토론과 협의를 통해 자체적으로 쓸 곳을 결정하게 하는 시스템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옥천군의 ‘대한민국 자치1번지’라는 군정구호와도 걸맞다. 주민 의견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린 주민지원사업비 옥천군 장학기금 출연은 민선5기 초기 운영 과정에서 내내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방침을 철회하고 주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한다.

▲ 겨울, 대청호 전경 ⓒ옥천신문
대청호 호반에서 ‘주인의식’을 느끼다

8월28일 대청호 호반을 배를 타고 돌아보았다.

옥천신문과 대청호주민연대, 신재생에너지포럼이 주관하는 ‘금강천리-물따라, 길따라 생명의 숨결따라’ 행사의 일환인데 대청호 건너 마을을 가기 위해 짧은 거리 배를 탔을지언정 아예 금강을 따라 들어선 대청호를 종단하는 일은 처음이다.

그동안 금강을 따라 대청호 주변 길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금강을 따라 배를 타고 물 위에서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에서 보은군 회남면 회남대교까지 두 시간이 넘는 뱃길이었지만 배위에 올라탄 서른 명 가까운 참가자들은 처음 맞이한 호수 주변의 경관에 눈길을 빼앗겼다.

땅위에서 ‘여기가 어디, 저기가 어디’라고 보았던 정경은 막상 물 위에서 보니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간간이 비가 오는 가운데에서도 일행들은 여러 얘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다.

물 위에서 처음보는 대청호 정경하며, 어느 골짜기에 마을이 있었는지,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가 서 있는 금강 물길이 결코 남의 것이 아닌 걸 깨닫게 된다.

더구나 “대청호 전체 면적의 30%가 넘는 면적이 옥천 땅인데, 우리가 주인인데”라는 생각에 이르면서 사람들의 눈은 크게 열렸다.

우리가 주인이면서도 그동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주인으로 행세하고 이 물길을 책임지려면 의당 책임있는 행위와 실천이 따라야 하는 법. 내년에는 옥천군내 청소년들을 위한 대청호 탐방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결의 아닌 결의로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대청호, 옥천을 생각하게 된다.

같은 말이지만 대청호의 주인이 우리라면, 주민 지원사업비의 주인은 마땅히 피해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이 되어야 할 터.

민선5기 옥천군 군정구호처럼 ‘대한민국 자치1번지’가 바르게 실천될 수 있길 기대하는 마음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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