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은 부화해서 처음 마주친 생물을 평생 어미로 알고 기억한다나? 그저 그런 하루 하루 평범한 일상을 알이라고 가정할 경우, 여행은 부화의 계기를 부여한다. 여행지의 첫 인상은 처음 마주친 생물이 제 어미로 기억되는 공룡이나 날짐승의 그것처럼 평생을 좌우한다. 웬만해선 깨뜨릴 수 없는 고정관념 같은 것, 다소 위험하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한 기억이 아닐런지.

스물다섯인가 여섯 무렵,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지는 일본 도쿄였다. 평범한 네 명의 여성이 떠난 여행, 지하도 복잡한 미로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던 때 열너댓 살 쯤 되어보이던 소녀는 가당찮은 일본어로 헤매고 있는 우리들에게 친절하게 길을 설명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우리 일행을 이끌고 복잡한 지하도를 걸어서 안내하기 시작했다. 간혹 뒤를 돌아보며 잘 따라오고 있는지 배려심도 느껴졌다. 몇 군데 로터리를 지나서 높은 계단을 올라 큰 도로까지 안내한 다음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다시 자기 길로 되돌아가던 그 소녀가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일본을 생각하면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소녀의 이미지만 따뜻하게 남아있다. 나는 간혹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듯 강렬하고도 따뜻한 첫 인상의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뭐, 일부러 좋은 이미지를 조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서 맑은 기운 송송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사실은 여행을 떠날 때 너무 큰 기대도, 너무 사소한 염려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의 일상에 덧대어 잠시 새로운 경험과 에너지만 얻으면 족할 따름,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여행의 기준이다.

▲ 리장 고성의 야경. 출처: 웃기는 비디오 가게 아저씨(http://www.utbia.com/)
몇 차례 중국여행길에서 특별한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지난 4월 중국 운남성 방문을 앞두고 <리장고성(麗江古城)>이 은근히 기대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리장고성, 사진으로 접한 홍등으로 물든 고성(固城)의 야경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게다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리장 고성을 모델로 하였다는 말도 들었던 터라 이곳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았다. 리장 고성에 대한 홍보가 그만큼 잘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1996년 현대 건축물이 산산히 부서져 내린 최악의 지진 속에서도 600여년 된 목조건물이 의연하게 재앙을 견뎌내었다는 것 만으로도 경이로운 일, 이로 인해 <리장 고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오래전부터 중국인이 가장 가고 싶은 관광지로 손꼽혀 온 리장 고성은 최근들어 세계적안 관광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 리장 유적지인 수호고성. 출처: 웃기는 비디오 가게 아저씨(http://www.utbia.com/)
이름값을 하느라고 리장 고성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발 디딜틈 없는 빽빽한 사람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가이드는 몇 번 씩 길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이마저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다. 훤한 대낮에도 비슷비슷한 상점과 골목길이 미로처럼 엉켜있어 살짝 강박감이 밀려오는데 자칫 일행이라도 놓치면 어떡하나 온갖 불안한 상상력이 머리를 헤집는다. 그래도 옥룡설산에서 흘러내린 깨끗한 물이 시가지를 따라 흘러내려 물길따라 걷는 재미도 쏠쏠하고 아기자기 늘어선 노천 카페는 오히려 서구적인 느낌을 준다. 그렇게 약간의 부산함과 고풍스런 분위기에 심취해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리장 고성에 서서히 적응할 무렵 밤이 찾아왔다.

대낮의 그것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주렁주렁 매달린 소시지 같은 홍등이 불을 밝히자 리장 고성은 불타는 성으로 변모한다. 그것도 나름 즐길만 했다. 사진속의 그것처럼 고혹적이기도 했다. 밝은 대낮에 겨우 익혀두었던 길거리를 기억하며 더듬더듬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적어도 내 상식으로)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다. 리장 고성 번화가 도로에서부터 풍악소리가 쟁쟁하다. 가게마다 문을 열어두어서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DJ 복장도 제각각, 홀 서빙하는 사람 복장도 제각각, 음악도 다양하지만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사이키조명까지 동원해서 노천 카페가 거대한 나이트클럽으로 변모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조명발’ 받으며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뛰고 구르는 동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조건물에서 나온 먼지가 조명 빛을 따라 굼실굼실 올라가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것이 한숨으로 보였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고풍스런 고성에서 게다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조건물이 조악한 상술로 인해 나이트클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운남이 좋아 제2의 고향으로 정착한 전북 군산출신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불과 3~4년 만에 리장 고성이 이처럼 유흥지로 변화했다고 한다. 유네스코에선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을까? 깊은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정부에서도 일정 보상을 하고 철거를 시도했으나 원래 주인과 사업을 하고 있는 세입자간의 조정이 안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반응이다.

▲ 리장 고성의 밤 풍경. 출처: 웃기는 비디오 가게 아저씨(http://www.utbia.com/)
해발 고도 2800미터, 깊은 산골 리장 고성은 순박하고 수줍은 처녀였다가 자본주의 유입과 맞물려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짙은 화장을 덮어 쓴 조악한 조형물로 전락하고 만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이 같은 풍경이 정체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 발산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게 있어 리장 고성의 야경은 다소 실망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동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클럽도 필요할 터, 하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600년 목조건물을 유흥주점으로 방치한다는 게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하다.

우리는 눈앞의 이익과 산술적 숫자에 연연해서 정작 지켜야 할 것, 보존해야 할 것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우를 범하곤 한다. 리장 고성의 몇몇 나이트 클럽은 이런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 같다. 찾아보면 나이트클럽보다 더 가치있는 콘텐츠가 있을 법한데 거기까지는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과거 ‘우리’가 그랬던 것 처럼.

최근 전주 한옥마을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2010 한국관광의 별’ 로 선정돼 전라북도에 경사가 났다. 한국관광의 별은 문화부,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한국여행작가 협회 등 관광 관련 6개 기관이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관광시설, 관광상품, 숙박시설 등을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어서 의미가 크다.

▲ 전주 한옥마을. ⓒ전주시 제공
전주 한옥마을은 1차 예선 결과 5곳으로 압축된 안동하회마을, 순천만, 통영 케이블카, 남이섬 등과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최종심사에서 1위를 차지해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다. 전북원음방송 “아침의 향기” 전화인터뷰에서 전주시 담당자는 “한국관광의 별 후보 시설분야에서 한옥마을이, 관광안내소 분야에서 전주 경기전 안내소가 후보로 오른 것만 해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고 소회를 밝힌바 있는데 급기야 전주한옥마을이 한국관광의 별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 전주 한옥마을. ⓒ전주시 제공
전주 한옥마을이 최고의 관광지로 선정된 배경은 우수한 전통문화시설,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홍보마케팅, 우수한 경관, 장애인 편익시설, 맞춤형 해설 투어 프로그램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700여채의 한옥이 즐비하게 늘어선 전주 한옥마을은 실제 주민들이 생활을 하는 거주지로 지난해 28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불과 10여년 전 관광객 숫자가 20만명 이던 것에 비하면 10여년 사이 경이적인 기록을 기록한 셈이다. 당시만 해도 전주한옥마을이 한국을 대표하는 관광 키워드로 떠오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전주한옥마을을 브랜드로 성공시킨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 한국관광의별 선정 포스터.
송하진 전주 시장은 “한옥마을이 올해 처음 시상하는 한국 관광의 별 원년 수상자로 선정돼 전주가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대한민국 대표 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전주시 조영호 관광홍보팀장은 수상식 직후 전북원음방송 인터뷰에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나 너무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전주한옥마을과 한국의 미래를 위해 슬로시티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전주한옥마을의 슬로시티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리장 고성>의 야경이 떠오르면서 ‘바로 이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관광지가 아닌 여행지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요소는 외형적 볼거리 즐길 거리가 아니었다. 내면의 감동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문화유산의 공감대였던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세계문화유산의 가치를 능가할 수 있는 감동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느리게, 좀 더 천천히, 그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 1. 이 글은 개인적인 소감으로 <리장 고성>을 다녀온 분이나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길 바란다. 여전히 아름답고 특별한 곳이다.

사족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DVD로 아들과 함께 다시 보았을 때 밤에 온갖 신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여관의 불야성 장면이 리장 고성 야경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정말 <리장 고성>을 다녀간 것일까? 아니면 불과 몇년사이 <리장 고성>이 영화속 장면처럼 북적댈 것이라는 미래를 예측이라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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