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의 내용에 또 하나의 의미가 더 있다면 그건 사회적 부조리 때문에 주변인이 되는 여자와 자기 책임으로 주변인이 된 루저 남자의 이야기겠죠.”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의 주연배우 박중훈이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전 이 말이 영화의 핵심을 정확히 집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부조리 때문에 주변인이 되는 여자’. 정유미가 연기한 옆집 세입자 세진입니다. 속칭 오늘날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젊은 세대를 대변하죠. 반면 ‘자기 책임으로 주변인이 된 루저 남자’. 박중훈이 연기한 오동철이란 깡패입니다. 이전 세대의 루저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옆집 세입자 세진은 취업을 위해 정말 목숨을 겁니다. 매일 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영양제로 끼니를 대신합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취업하는 데 쓰는 건데요. 그럼에도 취업은 여전히 높은 벽으로 다가옵니다. 여자, 지방대라는 딱지 외에도, 신자유주의라는 사회구조가 그녀의 노력을 가로막는 겁니다. 일단 기술력의 발전으로 노동력의 수요가 예전보다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노동자의 힘이 약화되면서 고용 불안이 심해졌고, 이로 인해 사회 초년병들은 경력 사원들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한 마디로 취업의 문이 더욱 좁아진 겁니다. 결국 옆집 세입자 세진은 목숨을 걸고 취업을 준비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외부요인 때문에 좌절을 겪게 됩니다. 왜 외부요인 때문이냐고요? 사회구조와 부조리는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죠.

반면 오동철씨는 좀 다릅니다. 그냥 공부가 싫어 펜을 놓고 살다보니, 건달이 돼버렸습니다. 때문에 오동철씨는 노력이 없었던 자신의 청춘이 한없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교육방송을 틀어놓고, 자신처럼 청춘을 허비하는 조직의 막내들을 보면 언제나 다른 일을 찾으라고 충고합니다. 오동철씨가 학교를 졸업하던 시절, 개인의 노력은 자신의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도 사회구조와 부조리는 존재했지만, 개인의 노력으로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거죠. 때문에 오동철씨는 옆집 세입자 방을 보고 매우 놀랍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겁니다. 오동철과 옆집 세입자의 간극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오동철의 세대와 젊은 세대의 차이로 확장됩니다.

사실 <88만원세대>가 젊은 세대가 겪는 부조리와 사회구조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지, 취업 실패의 멍에는 대부분 개인이 짊어져야 했습니다. 이는 분명 기존 세대의 눈으로 젊은 세대를 바라본 결과였습니다. 기존 세대는 자기의 노력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었던, ‘실패는 자신의 책임일 뿐’이란 가치관이 통용되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눈엔 오늘날의 실패자가 단순히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은 자로 비춰질 뿐, 그들을 막고 있는 구조의 거대한 불합리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학점이 선동열 전성기 방어율을 방불케 해도 쉽게 취직하던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학점에 목숨을 거는 요즘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눈을 낮추면 쉽게 취업할 수 있다는 어떤 분의 말도 전부 세대 간의 간극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옆집 세입자 세진은 분명 오동철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지하방을 사는 이웃사촌이 됐습니다. 결국 옆집 세입자 세진은 오동철과 지하 골방에서 소주를 마시다 눈물을 터뜨립니다. “내가 왜 지하 골방에서 깡패랑 술을 마시고 있어야 하는데~”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공부한 대가가 고작 학창시절을 허비한 깡패와 술 마시는 일이라니요. 결국 결과(지하방)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기존 세대에게 세진과 동철은 둘 다 똑같은 실패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과정(노력)의 차이를 알기 때문에 열불이 터지는 거죠.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자신의 열불을 속으로 삭히기만 합니다. 세진과 라면을 먹던 동철이 뜬금없이 그녀에게 말을 건넵니다. “우리나라 백수들은 그게 다 지 탓인 줄 알아. 다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 건데... 당당하게 살아…” 오동철은 분명 자기 책임 때문에 루저가 된 남잡니다. 그럼에도 동철이 목숨처럼 중시하는 것이 하나 있죠. 바로 가오(체면)입니다. 돈도 못 벌고, 싸움도 못하는, 내세울 거라고 하나 없는 동철이지만 가오 하나는 목숨처럼 중시합니다. 동철에겐 얻어맞으면 반드시 찾아가 되갚아주는 근성이 있고,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면서도 매우 부끄러워하는 체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동철은 조직의 돈을 갈취하고 있는 형사와 맞장을 뜨기 위해 찾아가는 거죠.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가오를 훼손하는 일은 안 만들겠다는 것, 그게 바로 오동철의 정신입니다. <내깡패같은애인>은 열불을 그냥 속으로 삭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취업에 목숨을 거는 건 좋은데, 적어도 우리 쪽팔리지는 말자”라고 말합니다. 취업에 올인 하면서도 가오를 잃지 말자는 겁니다.

<내깡패같은애인>은 작위적인 상황 설정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메시지가 영화 속에 아주 잘 녹아들어간 영화입니다. 유머도 곳곳에 숨어있고, 박중훈의 연기는 영화 전체의 질을 한 단계 높입니다. 사실 예전 우석훈 교수의 <88만원세대>가 나왔을 때, 정작 젊은 세대들은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토익책 대신 짱돌을 들어라”는 우석훈 교수의 주장 역시 젊은 세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기존 세대의 주장이란 이야기였는데요. 아마 사회서적의 딱딱함이 그들의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내깡패같은애인>은 그 어떤 전문 서적보다 ‘88만원 세대’가 처한 부당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입니다. <내깡패같은애인>의 드라마 속에 빠져들어 웃고 울다보면, 어느새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짱돌까지 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억울한 상황 앞에서 쪽팔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겁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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