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힘들게 벌어 쓴 112만원의 가치를 알기에 당신을 아낍니다.” 요즘 한 TV광고의 문구입니다. 남자, 여자 버전이 있는데, 남자는 회식자리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여자는 백화점 화장실에서 서러운 눈물을 흘립니다. 둘 다 노동의 고단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고는 ‘당신이 얼마나 X빠지게 고생하는지 알기 때문에 우리 캐쉬백포인트로 당신의 고생을 어느 정도 보상해주겠다’라는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요. 전 이 광고를 볼 때 마다 가증스러워 죽겠습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 상위 1%의 차’ 따위의 광고랑은 다른, 새로운 차원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광고는 영리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굴레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결코 소비를 멈추지 않는 이상, 노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명품 가방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카드를 긁게 되면, 또 다시 카드 값을 메우기 위해 백화점에서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일하고, 부장의 비위 맞추기 위해 자존심을 내던져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힘겹게 일한 대가도 점점 터무니없이 낮아지고 있죠.) 자본주의는 우리의 소비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그 대가로 우릴 노동의 감옥 안에 가둬놓는 겁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이 굴레 속에서 인간은 노동의 족쇄를 결코 풀어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광고는 이러한 현대인의 존재 비극을 다시 마케팅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마치 “당신이 힘들게 벌어 쓴 112만원의 가치를 알기에 앞으로 물건 살 때 천 원 씩 깎아줄 테니 더 열심히 소비하고, 그 돈 메우기 위해 한 눈 팔지 말고 일해라”라고 말하는 식이죠. 몇 푼 안 되는 돈을 할인해주고, 당신의 노동을 알기에 더 아낀다니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입니까. 노동의 가치를 안 다면, 저렇게 일한 사람에게 고작 112만원이 뭐냐고 외쳐야 맞겠죠. 결국 이 광고는 노동자를 위로하는 척 하며,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 굴레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상위 1%’ 운운하는 광고들은 그냥 무식했다면, 이 광고는 영악합니다. 그래서 전 더 화가 납니다.

사실 자본주의의 영악한 기만은 아주 일상적인 현상입니다. 커트 보네거트의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기만하고 지배하는지 잘 드러나 있죠. 소설의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는 갑부 집 아들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산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기행(?)’을 일삼게 됩니다. 이에 그의 주변인들은 그가 미쳤다고 판단해, 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이리 저리 충돌한다는 게 대강의 줄거리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는 다분히 이분법적이고 단정적인 소설입니다. 게다가 커트 보네거트는 상황을 단순화시키고, 과장을 섞어 소설 속 주인공인 로즈워터 가문을 탄생시킵니다. 한마디로 그는 공상과학소설을 쓰듯 로즈워터의 세상을 묘사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슬프게도 그의 과장과 단순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놀랍게도 닮아있습니다. 실제로 외계인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장르는 분명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처럼 말이죠.

안녕, 아가들아. 지구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단다. 그리고 둥글고 축축하고 붐비는 곳이지. 여기선 고작해야 백 년 정도밖에 못 산단다. 아가들아,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규칙을 말해줄까? 제기랄, 착하게 살아야 한다.’ (P.146)

그는 간단한 몇 개의 문장만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탄생을 요약해냅니다.

‘미국의 수많은 가산처럼 로즈워터 가의 가산도 애초에 유머나 융통성은 조금도 없이 교회만 열심히 다니던 시골 소년이 남북전쟁 때부터 투기와 뇌물을 일삼는 사기꾼으로 돌변해 쌓아올린 것이라오.’ (P.16)

‘그 돈이 스튜어트의 이름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시페어러 은행 신탁회사의 신탁 팀에 맡겨지자마자, 그 돈 농장은 수경재배를 하듯 그 돈으로 모종을 내고, 비료를 주고, 교배시키고, 변형시켜 해마다 팔십만 달러 정도를 불려나갔다.’

▲ ⓒ문학동네
미국의 부자는 남북전쟁 시절, 대부분 투기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미국 부자의 탄생 과정은 이미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의 대작 <데어윌비블러드>를 통해서 자세하게 그린 바 있죠. 록펠러도, 모건, 밴더빌트도 부자가 되는 과정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자들이 하나 둘 싹틀 무렵, 아직 미국엔 자본주의가 정착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귀족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형성돼가던, 세상의 질서가 급격히 변화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들은 부자가 된 것입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부자가 탄생합니다. 아직 자본주의의 세계가 공고화되기 전엔, 쌀집에서 일하고, 신문을 배달하던 소년들이 성장하는 자본주의와 함께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구조가 생성되던 시가, 계급의 장벽은 매우 낮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본주의가 공고해지고, 부자들이 성장하면서 얘기는 달라집니다. 혼란스러운 시기는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게 됐고, 부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확립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일반인들이 함부로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규칙을 설정한 것이죠. 이렇게 말입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평화적인 시민들은 최저임금만 요구해도 즉시 흡혈귀로 분류되곤 했소.’ (p.19)

‘그 교훈은 ‘미합중국이 유토피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누구든 욕심 많고 게으르고 천벌을 받아 마땅한 바보’라는 것이오.‘ (P.20)

이제 경제적 폭력과 사기는 순수경제학의 추상화작업이란 이름 속에 은폐됐습니다.(유한계급론, 원용찬 저/역 인용) 지식인과 언론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게으름’으로, 부자들의 투기행위를 ‘사업’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실제로 도금시대의 경제학자 러플린 교수는 “거대한 부는 희생, 능력발휘, 기술에서만 나오며 … 노동조합은 파업과 보이콧 대신에 노동자의 자질을 키우는 데 전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계급 장벽을 더욱 높게 세웠고, 더 이상 쌀을 배달하던 소년이 재벌 회장으로 성장하는 일은 나오지 않게 됐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아주 영악합니다. 만약 계급 장벽이 너무 높아, 부자가 될 확률이 너무 낮다면, 노동자들의 불만은 커져갈 겁니다. 그러면 자칫 시스템의 전복을 야기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환상을 제공합니다. ‘자, 쌀 배달하던 가난뱅이가 재벌 회장이 된 것처럼, 당신에게도 기회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동등합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이라면 부자도,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부자가 되고 안 되고를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으로 돌립니다. ‘우린 기회를 줬는데, 네가 게으르고 무능해서 가난해진 거다.’라고. 졸지에 부자가 못 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거짓말 속에는 부정의 은폐와 착취의 기만이 숨겨져 있는 겁니다.

“난 평생 동안 사람들에게 불행은 본인 탓이라고 말해왔지.” (P.95)

“‘사람들은 다 가질 만한 걸 갖는 거야. 안 그래, 버니?’/ ‘그게 바로 인생의 제 1법칙이지.’ 버니 윅스가 말했다.” (P.198)

하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때가 아닙니다. 계급은 물론 사회구조도 안정되었거든요. 부자가 갑자기 가난뱅이가 되지 않듯, 가난뱅이도 갑자기 부자가 되기 어려운 구조가 돼버린 거죠. 월급쟁이들이 열심히 일해서 월급을 모아도, 증권 대박 또는 아파트 대박이 터지지 않는 이상 내 집 마련도 쉽지 않은 게 현실 속에서, 사실 노동자들도 어렴풋이 자본주의의 희망이 환상에 불과하단 사실을 느낍니다.

“노동자들은 프레드에게 불편한 존경심을 품었다. 그가 파는 상품에 짐짓 냉소를 보내면서도, 내심으론 일확천금을 거머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즉 보험에 든 다음 일찍 죽는 것.” (P.152)

그럼에도 신자유주의가 건네는 환상은 거부하기엔 워낙 매력적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힘겹게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언젠가 자신도 강남의 부유층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현실에 순응하고 맙니다. 결국 노동자들의 믿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오늘날의 사회구조는 공고해지게 되는 거고요.

사회 시스템은 결국 우리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결코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대신 시스템 자체의 몸집을 불리는 데는 좋은 수단입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던 기계들이 오히려 매트릭스를 만들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계의 영역을 넓혀간 것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삶을 속박하고, 자신의 몸집만을 키웁니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 한국에선 “자본의 유출을 불러일으키는 상속세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 쪽에서는 대통령이 “여러분도 나처럼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상속세’를 폐지해서 현대판 계급제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움직임이 이뤄지는 현실.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보여준 기만의 얼굴입니다.

때문에 전 사람들이 좀 더 세상을 크게 보고, 의심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내가 속한 시스템을 무조건 순응하고, 시스템이 전달하는 환상을 무조건 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인간은 구조에 속박되는 수동적인 존재는 결코 아닙니다. 가난 탓이 전부 구조 탓은 아니라는 거죠. 그럼에도 오늘날은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며,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을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스템은 점점 우리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자본주의의 배만 불려준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거짓 환상에서 깨어나 온갖 부당함에 정당히 저항할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아니 적어도 포인트로 푼 돈 깎아주며, ‘당신을 아낀다’는 뻔뻔한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걸 아닐까요?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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