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35)씨를 아시나요? 2년 전 5월. 갈색 곱슬 머리를 휘날리며 마이크를 붙잡고 촛불 행진을 이끌던 광우병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 촛불집회장에 나타난 경찰 방송차가 수시로 “다함께 김광일씨. 순진한 시민들 선동하지 마세요”라고 경고하며 끊임없이 비난해대던 사람. 그리고 아직까지 경찰 조사를 받고 있지 않는 마지막 ‘촛불 수배자’. 그가 바로 김광일씨입니다. 이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2008년 6월 27일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김씨는 1년 10개월여간 수배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촛불 2주년을 맞아 무슨 기사를 준비할까 하다 그가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촛불집회가 이어지던 100여일간 늘 거리에서 역동적인 활동을 했던 그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사람들 머릿 속의 흐릿한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는데 그는 왜 지금까지 수배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이것 저것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 김광일 ⓒ허재현
그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딱히 연락할 방법도 없었고, 그가 어디에 있다는 정보조차도 얻기 어려웠습니다. 물 건너 잠적했다는 소문까지 들릴 정도로 그는 철저히 잠적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기는 했지만 어떻게 만나게 됐는 지는 이곳에 자세히 밝힐 수 없습니다. 다만 외국으로 도피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4월 어느 날 만난 그는 살이 많이 빠져있었습니다. 각진 광대뼈가 선명할 정도로 얼굴살도 빠져 있었고 그가 입고 온 상의가 헐렁하게 느껴질 만큼 체중이 많이 빠져 있었습니다. 김씨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서 활동하던 때 75킬로그램이던 몸무게가 지금 65킬로그램까지 빠졌다고 했습니다. 수배생활의 고단함 때문인가 물었는데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김씨에게 변한 것은 체격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투도 조금 변해 있었습니다. 약간 힘이 덜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김광일씨는 늘 씩씩하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말투였습니다. 토론을 즐기는 그는 매우 치밀한 성격이라 어떤 자료를 살펴보지도 않고 통계를 줄줄 읊으며 자신의 주장을 펴는 사람이었습니다. 웬만한 토론에서는 절대 상대에게 밀리지 않는, 어찌 보면 다소 인간적인 매력이 안느껴질 정도로 목소리에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오랜만에 만난 김씨의 목소리는 더 유연해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뻔하고 재미없는 인터뷰를 할 수는 없지요. 인터뷰 상대에게 다소 좀 아프고 매서울 법한 질문을 던져야 읽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좀 기분 상해할만한 논쟁을 붙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김광일씨. 수배를 택한 원칙주의가 오히려 자신에게 족쇄가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는 이 질문에 조금 느린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족쇄 맞습니다. 사실상 이명박 정부가 내게 채운 족쇄입니다. 하지만, 2008년 촛불 시위의 한복판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로서 정당하지 못한 ‘촛불 수사’에 응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당하지 못한 촛불수사’라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촛불에 관한 경찰의 수사는 지극히 정치적인 구석이 많았습니다. 편파적이었습니다. 도로교통법을 집시법의 변형처럼 활용하는 검경의 상상력은 집회의 자유를 우선하는 헌법정신을 유린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촛불 운동의 적법성 여부를 재판부에 가서 따질 수는 없을까?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찰 조사를 받는 것 자체가 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찰 조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행되는 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만약 지금 연행돼도 전 경찰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조계사에서 농성했던 광우병 대책회의 활동가들을 보세요. 모두 조사받고 풀려나 각자의 공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잖습니까.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다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실용주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내 자신도 공개적으로 활동하면 좋겠지만 정부의 탄압에 맞선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의 팽팽한 대화가 줄을 당기듯 계속 오고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수배생활에 대한 신념이 단단한 말뚝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런 뜻으로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김광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행진팀장이란 존재 자체가 잊혀지고 있어요. 당신의 수배생활이 아무런 효과를 못 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지금 당장 사람들이 날 얼마나 알고 있을까에 대해 저도 물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게 투쟁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투쟁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의 인지 속에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적당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이 간첩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 아닌 독재에 맞선 투쟁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는 데도 수년이 걸리지 않았나요.”

김씨는 실용주의자보다는 원칙주의자에 가까웠습니다.
옳은 일이라고 믿는 것에서는 타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직하게 수배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어쩌면 광우병대책회의 행진팀장도 그래서 맡은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김광일씨를 보면서 수십년간 사상 전향을 하지 않고 인생을 다바쳐 신념을 지키는 양심수가 떠올랐습니다. 김씨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뛰어드는 일보다는 고단한 양심의 길을 택한 듯 보였습니다.

수배생활은 어떤 것일까. 전 한번도 수배생활은 해본 적 없습니다. 불의를 못참고 덤벼드는 성격인지라 학교 다닐 때 이런 저런 사회운동에 참여를 해왔지만, 그런 극단의 골목에 내몰린 경험은 없습니다. 그것만은 피해왔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만약 수배자가 된다면, 내가 MBC 피디수첩 피디들처럼 수사 대상에 오른다면? 나는 과연 ‘언론 자유’를 외치며 수배생활을 선택할까. 글쎄요. 돌아오는 대답은 침묵이었습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김광일씨는 비록 수배중이었지만 여전한 활동가였습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지금은 숨죽인 채 지내고 있는 촛불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습니다. 20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68항쟁이 그에게는 희망의 젖줄이었습니다.

“68항쟁 때 나왔던 구호중 하나가 ‘저들의 악몽은 우리에게 꿈이다’라는 구호입니다. 저는 반대로 이런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저들이 꾸는 꿈은 우리에게 악몽이 될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악몽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거리로 나서야 합니다.”

위축된 것일까요. 아니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 뿐일까요. 2주년을 맞는 촛불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런 세상에 김씨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촛불은 이제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특별히 특집 기사도 쓰지 않는 조용한 촛불 2주년을 우리는 보냈습니다.

김광일씨의 이 조용한, 그러나 뚝심 있는 수배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지켜보는 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그에게 작은 식사 한 끼 대접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김광일씨 인터뷰 전문은 아래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8986.html

현재 한겨레 방송부문 뉴스팀에서 취재를 하고 있는 기자다.
영상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함께 들고 현장을 누비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앞선 멀티형 기자가 돼려고 노력중이다. 우리 사회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감시하는 사명을 놓는 그 순간, 기자가 아닌 단순 직장인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 그저 그런 기자가 되느니 문제적 기자가 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 살기도 한다. 한겨레와 한겨레 독자들을 무지무지 사랑한다.
개인 블로그 http://blog.hani.co.kr/catalu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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