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4번 출구로 나와 100m쯤 걸어가면 나오는 동교동 167번지 일대는 땅이 푹 꺼져 있다. 땅은 일대의 고층 건물 숲을 받히는 콘크리트 바닥과 어울리지 않게 흙과 모래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땅에 덩그러니 섬처럼 서 있는 3층 건물이 있다. 톱으로 잘라낸 듯 거친 시멘트 단면을 드러낸 채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선 그 건물에는 철거대상 딱지가 붙어있다. 대신 인천공항으로 가는 경전철역이 들어설 예정인 탓이다.
안종려씨는 2005년 3월 주택청약예금을 해약하고 대출받은 2500만원을 더해 1억원의 권리금을 주고 그 땅 위에 선 건물에 세를 얻어 칼국수집 '두리반'을 개업했다. 가난한 소설가인 남편 유채림씨만 바라보곤 '네 식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 싶어서 판 우물'이었다. 2007년 12월 어느 날 부부는 명도 소송장을 받았다. 건물이 들어서 있는 땅이 지구단위계획으로 '법적 근거'를 갖춘 개발지역이란 문서였다. 이사비용 300만원을 줄 테니 하루빨리 떠나라는 통보였다. 세 들어 사는 이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을 가진 임대차보호법은 그 이름이 상징함과 달리 지구단위계획 지역이 된 땅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세 들어 사는 이들의 밥벌이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땅에 삽을 댄 이들을 '풍요'롭게 만드는 개발이익이라고 그 법은 말했다. 세 들어 사는 소수의 이익보다 '풍요'의 혜택을 직접 얻는 이들과 그 '풍요'가 낳을 또 다른 '풍요'에 의해 범위를 잴 수 없는 다수가 이익을 얻을 것임을 재단해야 한다고 그 법은 말했다.
사람들은 절박하고도 일방적인 거래 관계에 놓일 때 자신이 이미 잃은 것은 지레 포기하고 앞으로 잃을 것을 걱정하며 일단 눈에 보이는 물질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선택임을 안다. 그게 옳은 선택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아는 까닭이다. 과거의 이익을 돌이키려던 이들은 끝내 앞으로의 이익마저 꺾이고 만다는 것을 한국의 과거는 꾸준히 말해줬다. 하지만 안씨는 홀로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며 한 줄기 목소리를 바득댔다. 안씨가 판 우물은 목이 마를 대로 마른 자가 땡볕 아래 판 최후의 샘이었다. 그런 안씨에게 그들은 2009년 12월 24일 두리반 현관 앞에 철판을 덧대어놓는 것으로 답했다. 안씨에겐 악만 남았다. 이틀 뒤 새벽 안씨는 절단기로 철판을 뜯어내고 들어가 농성했다. 5월 1일은 그날 이후 127일째가 되는 날이다.
그 땅에 음악을 켜는 이들과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14시간 동안 놀았다. '뉴타운 컬처 파티 51+'라는 명칭이 거기 붙었다. 뉴타운과 컬처 파티, 삶터를 빼앗긴 철거민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인디밴드는 얼핏 접함점을 찾기 어려운 조합이다. 하지만 이 만남은 몇 가지를 상징한다.
홍대는 과거 음악함을 밥 삼아 지내던 이들의 공간이었다. 허름한 건물 지하, 방음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방해받지 않고 노래하고 기타를 켜고 드럼을 치면 됐다. 사람들은 그 무규칙이 좋았고, TV를 통해 봐야하는 '대중성'이란 상징이 부대끼면 홍대라는 해방구로 모였다. TV가 요구하는 대중성은 대중이 욕망하는 대상의 집합체적인 대중성이 아니라 대중이 욕망하리라 믿어지는 신화의 집합체였음을 그들은 알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자본은 대중이 모이는 곳을 놓치지 않았다. 홍대는 어느덧 비대중성마저 대중적으로 소화하는 공간이 되었고, 자본은 그 틈을 노려 이곳저곳 개입했다. 건물 임대료는 뛰었고, 음악함을 밥 삼던 이들은 보습댈 곳을 잃고 서울 밖으로 하나 둘 밀려났다. 음악함을 밥 삼던 이들은 그때, 하나의 공간이 단순히 돈을 주고 빌려서 살아가는 의식없는 '즉자존재(being-in-itself)'들의 터가 아니라 음악함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에 함께 존재하지 못했을 때의 결핍을 인식하고, 함께 생존함의 의미에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대자존재(being-for-itself)'들의 터가 되어야함을 깨단했다. 재개발로 인해 생존함의 터를 잃어버린 철거민의 현재는 그래서 음악함을 밥 삼던 이들의 과거와 조우함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