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지지하는 것 이상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나? 파업하고 단식 중인 MBC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지금 MBC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우리와 무관한, ‘그들’만의 문제이고 ‘그들’끼리의 사안인가? 끝장날 수밖에 없는, 누군가 죽어야 상대가 사는 그런 막장 싸움판인 게 맞는가?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 ‘업무방해’ 혐의로 민·형사 고발 조치를 취한 사장과 ‘불법 집단행동’이 계속된다면 주도자는 물론 참가자에 대해서도 “법과 사규를 엄중하게 적용”하겠다는 사측에 맞서,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로 우리가.

▲ 30일 오후, MBC 노조원들이 MBC본사 1층 현관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송선영
이근행 본부장의 오 일째 접어드는 단식투쟁에 노조원 22명이 실명 동조하고 나섰다. 이들은 ‘동조단식에 들어가며’ 김재철 사장을 향해 다음과 같이 추상같은 글을 날렸다. “사람은 못 되도 짐승은 되지 말아야 하듯, 언론인은 못 되도, 추한 선배는 되지 말아야 할 것.” 섬뜩한 경고문이다. 사실 이번 파업 때 자주 듣는 말이 ‘선배’라는 말이다. 언뜻 보면 자기 식구를 지칭하거나 근친적 위계 관계를 의미하는 듯 하여 삐딱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게 선배라는 말이고, 따라서 선배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것은 신뢰의 파기이자 존중의 철회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적인 무기다.

인간적 대화, 상식적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고 판정한 이들의 최후통첩? “김재철은 이미 사장이 아니다. 사장실에 앉아있어도 사장이 아니다. MBC 역사 속에서 김재철은 단지 한 줄, 두 달 사장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그렇게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고향 사천에 가서 정치하시길 바란다”고 썼다. “비겁하게 총선까지 비어있는 기간 동안 MBC 사장하면서 경력도 쌓고, MBC를 지렛대 삼아 당신의 피의 순수성을 보여주는,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길 생각은 말라”고 경고했다. 대체 이렇게 절규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용사’도, ‘영웅’도 아닌 이들은 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명단의 맨 앞에 적힌 성장경 석자. 시청자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언젠가 <뉴스후>에서 종교인 면세 논란과 자녀세습 관행을 고발했다가 ‘사탄’이라는 악명을 덮어쓴 장본인이다. 교회 내부 문제를 말 그대로 깊숙이 들여다보고자 한, 종교권력이 금한 진실탐사의 죄를 저지른 자다. 그렇다고 그를 급진적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사실 그의 저널리즘은, 최소한 공적으로 드러난 활동을 통해 볼 때 지극히 온건한 편이다. 2009년 11월 27일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4년간의 공식 활동을 접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성과와 한계를 짚었다.

“친일파에 대한 연구 작업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줄곧 언제까지 과거사에 얽매일 거냐는 시비에 휘말려 왔습니다. 객관적으로 역사를 밝히고, 이로 인해 드러난 잘못을 인정하는 것. 과거의 과오가 현재의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입니다. MBC 뉴스 성장경입니다.” 임영서 기자가 그와 함께 있다, 2004년 전국언론노조MBC본부(위원장 최승호)의 보도민실위 간사로 일했다. MBC뉴스의 지나친 선정성과 보수화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작년 5월 25일 <뉴스데스크>에서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을 정리한 것도 그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 원망하지 말라는 당부, 운명에 대한 느낌 그리고 화장과 작은 비석에 대한 부탁까지. ‘오래된 생각이다’라는 마지막 말은 24분 동안의 고민이 아닌 63년 파란만장한 삶이 농축된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그래서인가 5시 44분, 18분간의 수정을 마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친 글을 저장한 다음, 지체 없이 인터폰을 연결해 경호관에게 ‘산책 나갈께요’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제 모든 정리가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결심을 굳힌 노 전 대통령은 24분 동안의 세상에 대한 작별인사를 마치고 사저를 나섭니다. MBC 뉴스 임장경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단식에 참여한 이동애. 똑같이 보도하는 것을 보나 말하는 것을 보면, 여타의 기자들과 별 다를 것 없는 그런 기자다.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도 권력 비판, 진실 발언의 저널리즘 원칙을 고수하고자 하는 기자다. 2008년 4월 당시 한국기자협회가 연 18대 총선보도 정당반장 초청 간담회에 그녀는 MBC 정치부 차장대우(한나라당 반장)으로 참석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 아니면 진보냐 보수냐 식으로 나누면 언론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권력과 정부는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비주류와 주류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떠한가? 그녀의 생각에서 어떤 불순한 색깔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떤 언론사도 가치중립적인 언론사는 없다. 그것은 기계적인 균형이다. 항상 그걸 가지고 균형을 맞췄다. 중립적이라고 하면 얘기가 안 된다. 주류적인 시각이 있다면 그 주류적 시각에 반대하는 소수자 목소리 혹은 다른 목소리를 놓치지 않고 전해 줄 수 있다면 언론이 적어도 권력과 함께 가지 않는다는 얘기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성장경이나 임영서 기자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자가 아닌가? 이런 기자들이 상식의 저널리즘을 실천하지 못하고 파업에 동참하고 단식에 나선 것이다.

피디들의 면면을 살펴볼까? 앞선 세 사람을 뉴스에서나 봤다면, 나는 최원석과 조준묵, 그리고 박건식 피디는 모두 개인적으로 좀 안다. 최원석. 잘 나가던 드라마 피디였다. 그런데 시사교양물을 연출하고 싶다며 힘든 길로 들어선, 진짜 희한한 인간이다. <사실은>, <암니옴니>, <뉴스후>를 연출한, 탁월한 감각의 소지자다. 프로그램도 물론 센 것들을 많이 했지만, 앤딩 곡이 인상적이라는 말을 유독 많이 들었던 그다. “재미없이 어떡해요. 맨 날 골치 아픈데.” 보도의 괜한 엄숙주의를 깨고 싶었던, 멋지고 실력 갖춘 전형적인 ‘딴따라’ 피디였던 셈이다. 꽤 오래 그가 연출한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느낀 인상이 그렇다.

조준묵. <북극의 눈물>을 연출한 또 다른 명선수다. 나는 <피디수첩> 김보슬 피디를 먼저 알았다. 결혼하기 직전, 그러니까 김 피디가 광우병 보도문제로 검찰에 체포되었을 때 나는 <미디어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정해진 너의 결혼 아무도 막을 수 없고 / 2009년 4월 19일 1시에는 어디에서든지 결혼식 / 네들은 이미 서로 혼인을 맹세한 사이 / 벌써 하나 되어 미래를 함께 생산해야 할 관계 / 4월의 신부여, 부디 몸 잘 간수했다가 / 기다리는 그대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오시라.” 초대받지 않은 경찰들이 참석한 결혼식장에서 나는 그의 선량한 얼굴을 처음 봤다.

1년의 시간이 흘러, 김 보슬 피디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없다. 그녀가 실력을 발휘할 시간은 과연 언제 돌아올까? 이제 김보슬의 반려자 조 피디에게, 그녀를 대신해 비참의 현실을 살피고 현실의 비참을 고발해야 하는 데 그러하지 못하는 조준묵 피디에게 당부하게 되었다. “결혼한 지 고작 1년밖에 안되어 단식 시작한 신랑이여, 부디 투쟁에서 이겨 우리에게 안타까운 <남극의 눈물>을 보여주시게. 슬픈 <4대강의 눈물>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그럴 수 있도록 분투하면서, 부디 몸 잘 간수하시오.” 어찌 이 말이 조 피디 한 명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박건식. 말할 때 보면 눈매와 말투 모두 참 매섭다. 웃음기 잃지 않고 목소리 낮춰 조곤조곤 말하지만, 참사의 눈길과 매서운 탐침이라는 피디저널리즘의 무기를 잘 갖춘 최고 선수 중 한명이다. 탐사 취재의 테크닉을 본격적으로 연수한, 지금처럼 앞으로도 오랫동안 국가권력·자본권력과 대적할 실력 갖춘 저널리스트다. <PD수첩>의 튼실한 어깨고 몸통이다. 2001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한국전쟁 때 일본이 병력 지원과 각종 자문을 통해 개입한 사실들을 폭로했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가 6.25를 통해 새로 부활한 사실을 고발했다.

그때 그는 “일본의 한국전쟁 참전은 일본 우익이 확대되는 발판이 됐으며, 여기에는 일본을 전범국가에서 풀어준 미국의 책임도 크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다. 감각적인 연출가, 눈물의 피디와 함께, 이런 군국주의 감시의 저널리스트가 단식에 참여한 것이다. 부정과 비리, 부패와 오만의 그 어떤 권력이라도 등골이 써늘하지 않을 수 없는 한방의 선수가 이렇게 굶고 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단식에 동참했다. 앞서 언급한, 내가 좀 더 잘 안다는 이유로 소개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이들이다. ‘전사’라는 호칭, ‘영웅’이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자들의 자발적 고통 감수이자 불의에 대한 저항의 표식이다.

곡기를 끊음. 반성과 성찰의 표현이다. 의지와 긍지의 발휘며, 사랑과 연대의 선포다. 인간으로서, 바로 그 인간의 몸을 내건, 지극히 인간적인 직접행동이다. 상식적인 수준의 저널리스트로 복무코자하고, 재미와 감동·공익이라는 다양한 이유로 좋은 프로그램을 연출코자하며, 또한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을 위해 자신의 기술력을 발휘코자하는 그런 보통의 방송 노동자들의 발언이다. 이제 스톱! 파업에 참여한 수 백 명의 노동자들 가운데 먼저 이근행을 비롯해 23명이 먼저 단식에 나섰을 따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단식이라는 비상한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쩔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인가? 자신의 일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곡기마저 끊겠다는 비상한 심정의 이들을 방관할 것인가? 자사의 명예, 자신의 자존심을 보존키 위해 배고픔의 고통마저 감수하겠다는 사람들을 결국은 경찰과 검찰의 손에 넘길 것인가? 자유언론과 공영방송, 방송독립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자들이 뻔히 공권력과 마주치도록 하는 게 맞는가? MBC를 지켜달라고 온 몸으로 호소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살릴 길은 무엇인가? 전혀 책임지는 않으려는 자를 대신해 이제 MBC 사태의 합당하고 평화적인 해결 답안을 고민해야 할 자는 바로 우리가 아닌가? 우리, 바로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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