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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비평]죄책감과 삶을 사랑하는 외로움의 어울림

파주, 너무나 다른 사람이기에 할 수 없는

2009. 10. 25 by 이용석 객원 칼럼니스트

파주, 라는 도시가 지도에서 성큼 걸어 나와 내 삶으로 들어오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치 지도 저 끝에 존재하는, 그래서 평생 가 볼일 없는 곳처럼. 가끔씩 군대 갔다온 사람들의 지루한 군대이야기 속에 ‘화천’이나 ‘양구’처럼 등장했을 뿐이다. 임진강, 통일전망대, 헤이리는 익숙해도 파주. 파주를 발음할 때는 왠지 어딘지 모르는 어색함이 밀려들었다. 어쩌다가 덜컥 취직한 직장이 파주에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면, 파주는 오래도록 내 의식의 지도 저 가장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

안개에 갇힌 남자 중식

영화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자유로의 풍경으로 시작한다. 실제 파주에는 안개가 많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서 조강을 이루는 곳이라서 그런지, 출근하기 위해 일기예보를 눈여겨보면 파주, 문산지역의 짙은 안개 소식을 종종 듣는다. 안개는 촘촘하게 온 몸을 감싼다. 투명한 듯,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을 만든다. 어느 덧 가야할 길과 방향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 영화 '파주' 포스터
중식(이선균)은 안개 속에 갇힌 캐릭터다. 중식을 둘러싼 안개는 죄책감과 부채의식이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배를 받아 잠시 몸을 피하기 위해 파주에 있는 선배의 집에 머무르게 되지만, 첫사랑이던 선배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분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로 선배의 갓난아이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게 된다. 도덕성이 생명인 운동권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 때문에 아기가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이후 중식은 그 상처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한다. 잠자리에서 은수(은모의 언니)를 거부하기도 하며, 언니를 죽게 한 은모(서우)의 실수도 자신이 다 뒤집어 쓰고자 한다. 물론 ‘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은모가 느껴야할 죄책감을 은모보다 먼저 너무 크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중식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철거촌 망루 위에서 다시 돌아온 은수가 이 일을 왜 계속 하느냐는 질문에 “처음에는 멋있어 보여서 했고, 나중에는 내가 너무 많이 가진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죄책감에서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도 공부방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치고, 번듯한 직업하나 없을 때도 탈북자를 돕다가 경찰에 끌려가고, 철거투쟁이 한 참일 때는 화염병을 사용하자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구속되겠다고 말한다. 중식의 이런 몸부림들은 사회의식의 거창한 발로라기 보다는 원죄처럼 지니고 있는 부채의식 때문이다. 중식의 행동이 기만적인 위선이나 위악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철거민들)이 신뢰에 기반해서 바라보는 중식의 모습은 중식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망루처럼 위태로운 여자 은모

영화의 시작과 끝이 ‘파주로 돌아오는 은모와 다시 떠나는 은모’라는 사실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사실상 은모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삶에서 튕겨져 나와 파주에 정착하게 되는 중식과는 달리, 은모는 파주에 삶을 두고 자랐지만 끊임없이 그곳에서 탈출하려 한다.

은모는 솔직한 여자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중식과 결혼한 언니를 중식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때도, 중식을 중식의 첫사랑인 선배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했을 때도, 그리고 다시 한 번 파주를 떠나게 될 때도.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다.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으로 자기의 삶을 메어두지도 않는다. 물론 중식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은모의 실수가 언니를 죽게 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안개에 뒤덮힌 파주를 다시 떠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중식이 벗어날 수 없는 안개가 은모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영화 '파주'의 한 장면ⓒ'파주' 공식사이트
은모가 돌아온 파주는 재개발이 한참이었다. 은모가 중식과 함께 지내던 집도 철거촌에 자리잡고 있고, 중식은 철거민대책위 위원장이 되어 있었다. 뿌리내리려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이 강제철거가 웅변하는 진실이다. 건설자본의 가장 추악한 모습은 막대한 이익을 챙기려는 그들의 천박한 윤리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파괴하는 인간 본성-마을공동체에 뿌리내리려는 소박한 소망에 대해 조금의 미안함이나 부끄러움도 가지지 않는 후안무치다. 때문에 철거민들은 자기의 의지와는 다르게 가장 위태로운 존재로 내몰린다. 뿌리내리지 못한 삶은 망루처럼 위태로워진다. 은모는 돌아와서 철거민이 되기 전부터 철거민과 같은 상황이었다. 집과 가족(중식은 처음에도, 그 이후에도 은모에게 ‘가족’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다)은 있었지만,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은모를 차라리 혼자 떠나는 길로 내몰았다. 망루 위에서 중식을 다그치는 은모를 볼 때, 망루가 먼저 무너질 지, 은모가 먼저 무너져 다시 떠나게 될지, 조마조마 했다.

도망치고 싶어서 머무르는 사람과 혼자이기 싫어 떠나는 사람

‘파주’를 단순하게 형부와 처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한다면 영화를 보고나서 심한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중식과 은모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중식과 은모가 형부와 처제 사이라는, 남들의 눈길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중식과 은모가 애시당초 너무나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얼핏 중식은 더불어 사는 사람이고 은모는 혼자서 떠도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삶을 사랑해 혼자가 되기 싫은 은모를, 안개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사랑할 겨를이 없는 중식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은모는 솔직하게 자기를 사랑했냐고 중식에게 묻는 그런 사람이고, 중식은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며 애매하게 돌려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못하지만 솔직한 속내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중식에게 은모가 할 수 있는 말은 “나한테 할 말이 그것 밖에 없어요”인 것이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은모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끝내 자기가 다 감당하려는 중식을 은모는 떠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커다란 감동이나 흥미진진한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설 때, 희미한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 같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파주의 밤을 감싸는 실제 안개였는지, 아니면 영화가 남긴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자유로를 달리는 버스 창에 내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 그 모습이 문득 죄책감과 부채의식에 갇혀있는 중식 같기도 하고 삶을 너무 사랑해 외로운 은모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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