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심의위원회(위원장 박만, 이하 방통심의위)가 논란이 돼 온 '통신심의'와 관련해 게시글을 올린 당사자에게 의견진술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검토해 보기로 했다.
지난 8일 방통심의위 2기 출범 이후, 방통심의위 산하 통신심의소위원회에서는 '중앙행정기구의 요청이 있는 건'을 제외한 통신심의 안건 일체가 처리되지 못하고 있었다. 통신심의소위 소속 박경신 위원(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 "방통심의위의 시정요구가 행정명령이라는 법원의 판결도 있었고, 시정요구에 대한 준수율도 95%가 넘는다"며 "행정명령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에게 소명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심의를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방통심의위는 27일 전체회의에서 △방통심의위 사무처가 통신심의 전체 안건 가운데 불법, 음란정보 등 각 유형별로 10%에 한해 소명기회를 주도록 한 뒤 관련 통계를 내고 △그 결과를 사전의견진술 기회에 대한 본격 논의시 활용하기로 합의했다. 사전의견진술 기회 관련 대목이 합의됨에 따라 그동안 미뤄져 왔던 1061건의 통신 심의 안건 역시 여야 방통심의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처리됐다.
박경신 위원은 "당사자 사전의견 진술 기회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제안할 것"이라며 "6월 중순 임시회의에서 개정안과 관련해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자"고 밝혔다.
여야 방통심의위원들, '사전진술 기회' 입장차 뚜렷
방통심의위가 당사자 사전의견 진술 기회 부여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으나, 실제로 시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날 전체회의에서 여야 방통심의위원들이 '사전진술 기회'에 대해 뚜렷한 입장차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박경신 위원(문방위 추천, 민주당 몫)은 "(통신심의에 있어서의) 시정요구는 방통심의위가 공권력의 권위로 포털사업자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요청을 받은 해당 사업자가 글을 쓴 당사자와 전혀 상의하지 않고 게시물을 내리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며 "단순히 '권고'에 해당하지 않는, 공권력의 행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법률에는 시정요구가 어떤 절차와 기준을 따라야 된다고 전혀 명시된 바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헌법에 맞춰 판단하면 된다"며 "헌법의 적법절차 원리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최소한 의견진술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택곤 위원(국회의장 추천, 민주당 몫-전 전주방송 사장)도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면서도 방통심의위를 '독립민간기구'로 출범시킨 것은 정치적 중립성을 가진 행정기구라는 열린마음으로 심의를 하라는 것 아니냐"며 "공무원적 발상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사전진술 기회를 부여할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반면 권혁부 부위원장(국회의장 추천, 한나라당 몫-전 KBS 이사)은 "예를 들어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와서 당신의 의견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 사이에 더 어마어마한 피해가 벌어질 수 있다. 게시자 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백, 수천만명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의 피해를 방치해야 하느냐"며 "사전진술 기회를 주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반대 의견을 명확히 했다.
이어 "마치 우리가 국민의 기본권을 위배하는 것처럼 단정해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방통심의규정과 법규에 따라서 심의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엄광석 위원(국회의장 추천, 한나라당 몫-전 SBS 논설위원)은 "박경신 위원의 문제제기에 원론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사전진술 기회를 부여할 경우 엄청난 예산낭비가 초래되는 등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찬묵 위원(대통령 추천,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은 "시정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 '이의신청'을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며 "현재의 규정만으로도 충분히 당사자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경신 위원은 "이의제기를 해봐야 다시 방통심의위로 돌아오게 된다. 이의신청을 가지고 절차적 권리가 보장됐다고 할 수는 없다"며 "사전의견진술 기회도 주지 않고 방통심의위가 시정요구를 하는 것은 판사가 피고 없이 원고 이야기만 듣고 판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