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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2002! revival2007?] 잊혀진 개혁국민정당의 역사, 그리고 희망돼지 모금

[대선기획④]2002년 하반기, 후보교체론에 시달린 노무현을 살린 것들

2012. 06. 08 by 김완, 한윤형 기자

편집자 : 2012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3주기이면서, 그가 최초의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지 10년이 되는 해다. 2012년 대선의 해를 맞아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바라는 이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적어도 올해의 대선이 2007년보다는 2002년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설령 정권교체가 안 되더라도 중요한 일이다. 2002년의 이회창은 최소한 박빙승부가 예상됐기 때문에 촛불시위에도 참여하는 등 반대파도 품으려고 했지만, 2007년의 이명박에겐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고 그 차이가 현 정부의 통치 스타일을 규정했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미디어스>는 2002년 대선의 주요 국면들을 분석하고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는 특집 기사를 통해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던지려고 한다. ‘조직’과 ‘구도’에서 2002년과 유사한 2012년 대선의 상황을 올해의 ‘인물’들을 대입시켜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지금 이 순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정당의 역사는 보통 ‘민주노동당’을 통해 대표된다. 특히 보수언론은 과격한 집단이었던 민주노동당이 자신의 친북적 정체성을 통합진보당 창당이란 화장을 통해 숨기며 나타난 것으로 평가한다. 즉 통합진보당의 서사를 1997년 ‘국민승리21’의 권영길 대선출마로 결집하여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시킨 그 집단의 후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신당으로 분당했다가 다시 통합진보당으로 돌아온 노회찬·심상정 의원과 조승수 전 의원은 폭넓게 민주노동당의 역사에 포함될 수 있을지라도, 이런 접근은 전혀 다른 역사적 문맥을 가진 한 집단의 역사를 배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집단을 ‘친노’라 부르거나 ‘유시민’으로 축약해 표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부르면 개혁국민정당으로부터 시작해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을 거쳐 국민참여당 주권당원으로까지 이르게 된 이들이 상당수인 이들의 역사의 의의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일 수 있다.

2002년 당시 노무현이 ‘광주의 선택’으로 ‘노풍’을 불러일으킨 다음에 닥쳐온 것은 위기국면이었다. 우리는 이 위기상황에서 어떠한 새로운 운동의 흐름이 탄생한 것을 기억하고, 현 상황에 적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흔들리는 ‘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유시민의 절필선언

그해 월드컵 4강이 없었더라면 노무현은 최종적으로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2002년 초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김동성의 금메달 박달로부터 월드컵 4강까지 이어지는 국가주의의 고양이 없었다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에 대한 추모열기가 대선 국면의 마지막을 강타하고 “반미면 뭐 어떠냐”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선출해내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월드컵이 끝난 상황에서 월드컵의 경이적인 결과는 노무현에게 악재로 다가왔다. 정권 말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게이트’와 노무현 후보 본인이 후보 당선 직후 김영삼을 찾아간 일 등으로 지지율이 빠지는 가운데, 월드컵에 큰 공로가 있는 정치인으로 알려진 정몽준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2002년의 국가주의적 고양은 스포츠에서 있었던 사건들과도 결부지어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지율이 빠졌다고 해봤자 50%가 넘던 지지율이 35% 정도로 빠진 상황이었다. 지금의 민주당 대권주자들에 비하면 ‘폭망’이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본인이 민주당 내에서 착근하지 못한 상황이 겹쳐, ‘후보 흔들기’가 시작되었다. 국민경선이라는 당내 절차로 합의되었으며 시민참여에 기반 한 이벤트로 당선된 후보를 너무 쉽게 버리려는 움직임이 감지된 것이다. 이미 경선과정에서 이인제 후보는 노무현 후보를 ‘극좌’라고 칭한 바 있었다.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가 ‘사상이 의심스럽다’거나 ‘저질이다’라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7월 30일,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정권재창출을 위한 ‘백지신당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사실상 국민경선의 결과를 무위로 돌리는 신당창당론을 주창한 것이다.

물론 이를 전적으로 “노무현을 싫어해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민주당 내 보수세력의 폭거”로만 규정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노무현 스스로가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그냥 김영삼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영남 민주화세력과 호남 민주화세력의 통합’이란 주제를 가지고 민주대통합론을 펼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시민들이 이미 뒷방 늙은이로 여겼던 김영삼을 영남 민주화세력의 상징으로 보고 지방선거에 일부 공천권을 행사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인데, 이 승부수가 시민들에게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리고 훗날에도 종종 그랬듯 노무현 후보 스스로가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자치단체장에서 전패할 경우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말한 상황이었다. 민주당은 노무현 후보가 스스로 주장한 그 재신임을 묻기 시작했고 결국엔 신당창당론까지 나오게 된 상황이었다.

▲ 인터뷰하는 유시민의 모습 ⓒ오마이뉴스
이에 시사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여기저기 칼럼을 쓰던 유시민이 ‘절필선언’을 한다. 뉴미디어가 없었다면 이 선언은 그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2000년부터 영향력을 확대하여 2002년 즈음에는 이미 궤도에 올라가 있었던 오마이뉴스가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유시민을 전격 인터뷰했다. 8월 1일 인터뷰에서 유시민은 "그라운드(정치판)에서 선수들이 반칙을 하는데도 심판이 제지하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이 지속되고 있어 해설을 때려치고 그라운드의 룰을 세우려 운동장에 뛰어들려고 한다"며 비유적으로 '절필 이유'를 설명했다. 또 그는 "국민후보로 뽑힌 노무현을 아무런 이유없이 낙마시키려고 하는 민주당 반노(反盧)·비노(非盧)그룹의 행동은 국민들에 대한 배신 행위이자 사기 행위"라며 "이같은 비민주적인 행위에 대해 규탄하고 항의하는 시민·지식인 사회의 목소리를 조직하는 일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기에서 저 유명한 "(학생운동 시절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당시의 인터뷰 문답을 보면 지금의 시점에서 봐도 신선한 것이 적지 없다. 지금의 정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 그렇고 이 말을 한 사람이 유시민이란 점도 그렇다. 가령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 정권재창출을 1차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반창(反昌)연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반창연대를 왜 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그건 이회창이 추구하는 가치와 대별되는 새로운 가치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 도대체 박근혜·정몽준·이인제·박상천·정균환·한화갑 등이 모여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들이 이회창과 특별히 구분되는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반창연대는 필요할 수도,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안티(anti)테제로써가 아니라, 이회창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권재창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슨 가치의 차별이 있느냐. DJ를 따라 다니는 아류 집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다는 것 말고 어떤 연속성이 있느냐. 그건 정권재창출은 아니다. 이회창이 집권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치다.

정당의 목적이 집권이라는 잠꼬대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외국의 예를 들어 미안하지만, 집권 연정의 주니어 파트너인 독일 녹색당은 1980년대 초부터 지방의회에 진출하기 시작해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주체가 되어) 집권을 하지 못했다. 녹색당은 전체 의석 수가 6∼7%인 미니 야당이었지만, 사민당과 기민련 등 거대 정당의 환경정책을 다 바꾸어 놓았다.

녹색당이 야당으로 있으면서 환경공약을 지속적으로 내놓았고, 거대 정당들은 표를 의식해 자기 당 환경 강령을 녹색당에 가깝게 수정해왔다. 정당은 이처럼 정치적인 꿈과 이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한다. 집권당이 되면 그 꿈은 더 빨리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겠지만, 야당이라고 해서 못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지금 정치 상황을 보면 집권하기 위해서 꿈을 버리는 쪽으로 가는 정치공학이다. 신당·재창당·반창연대 등을 앞세우는 것은 정치 모리배 집단·정치업자들이나 할 일이지, 정치지도자가 할 일은 전혀 아니다. 나도 이런 말을 직접 하기 위해 칼럼니스트를 집어치운 것이다."

인터뷰 전문 링크

또 “현재 민주당은 정당이 아니고 임시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패거리 집단”이라는 그의 진단은 오늘날의 정치평론가들도 쉽사리 내릴 수 있는 진단일 것이다. 그러나 그후 진보정당과 유시민의 십년 풍랑이 보여주듯 민주당이 그렇다는 이유로 다른 정당을 만드는 것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보수양당 모두 이런 정도의 정당조직인 풍토 속에서 어떤 종류의 정당개혁을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닥쳐온다.

개혁국민정당 창당과 문성근의 연설

유시민의 제안은 8월부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8월 15일에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라는 책의 서문을 쓰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2002년 대선을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으로 규정하고, 이 싸움이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 미래를 지향하는 개혁 세력과 과거로 퇴행하는 수구 기득권의 싸움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이미 2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던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좌표를 제공한 것이었다. 한편 8월 28일에는 개혁국민정당이 창당되었고 다음날 홈페이지가 오픈되었다.

개혁당은 설립 당시 ‘민주당의 강령과 민주노동당의 조직’이라는 슬로건을 흔히 썼는데 이는 그 정당이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좌파 정당이 아닌 중도개혁 세력의 정당이었지만 그런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도 진성당원제라는 제도가 필요했음을 천명했다는 데에 있다. 즉 개혁당은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의 좌표를 민주노동당과는 다르게 설정했지만 그 길을 가는데에 있어서도 정당개혁이 필요했음을 알았던 정당이었다.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 협상논의를 하는 이정희 대표가 이념이 다른 국민참여당과의 합류를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향해 “진성당원제야말로 진보정당의 기준”이라고 말했던 것과는 달랐다. 사실상 그것은 지향과 조직, 목적과 수단을 전도시키는 주장이었다.

개혁당의 홈페이지엔 폭발적인 당원가입이 이루어졌다. 이미 형성되었던 노사모와 같은 시민집단이 큰 도움이 되었고, 노사모 활동에도 적극이었던 명계남과 문성근 등의 명사들도 물론 합류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스스로를 “2만 당원의 정당”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개혁당은 한두달 만에 그 숫자를 앞질렀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거기엔 허수가 있었다. 개혁당이 최대규모였을 때 당원은 6만 명 정도였는데, 이중 상당수는 그저 홈페이지를 가입한 수준이었고 당비를 실제로 내는 진성당원은 2만에서 3만 사이쯤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이 시기 민주노동당의 규모와 엇비슷한 정도다. 노무현이라는 지향이 명백해 보이고 대중성이 있으며 열혈지지층이 있는 대선주자를 두고, 유시민·문성근·명계남 등 당대의 명사들이 붙었으며, 강준만과 같은 지식인이 “(당원이 되어) 정당으로 쳐들어가자!”고 역설한 상황에서 모인 숫자가 그 정도였다. 한국 사회에서 돈을 내는 진성당원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의 일을 돌이키면 당권자가 4만이 넘는 통합진보당에 개입하여 그 안에서 다수파가 되자는 ‘아큐파이 통진당’이라는 제안이 상당히 낭만적인 제안이란 사실도 알 수 있다.

▲ 약 9분에 걸친 문성근의 연설은 지금도 유튜프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혁당 절정의 순간은 아마 12월 10일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개혁국민정당 대통령 후보 결정 선언 당시의 문성근 연설일 것이다. 당시의 연설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전설의 명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예! 반갑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그리고 개혁국민정당 당원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갑니다.
부패한 돈이 아니라 당원이 깨끗한 돈으로 움직이는 정당!
정치모리배가 아니라 생활인이 움직이는 정당!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 두려워할 줄 아는 정당!
개혁국민정당의 첫 발을 힘차게 내딪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치를 술안주 삼아 욕만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정치를 바꿔 나가겠습니다. (후략)

‘희망돼지’ 모금, 노무현을 바닥에서 구해내다

그러나 개혁당의 창당 시점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바닥의 순간이 아니었다. 물론 그 전에 창당되었다는 점에서 개혁당의 창당은 재빠른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8월에서 10월 사이 계속 하락했고 그 최저점은 12%였다. 이회창-정몽준 양강 후보에 밀려 고사할지 모르겠다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노무현이 후보인 새천년민주당과 정몽준이 후보인 국민통합21 사이의 점이지대를 형성한 것이었다. 직후엔 더 쇼킹한 사건이 터졌다. 2002년 지방선거 서울후보였던 김민석 의원이 민주당을 이탈하여 아예 정몽준의 국민통합21로 건너간 것이다. 노무현 후보와 함께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시청광장으로 유세를 다녔으며, ‘옥석논쟁’에서 민주당지지 논객들의 옹호를 받던 그 김민석이었다. 인터넷은 삽시간에 ‘김민새’를 비난하는 물결로 뒤덮였다.

그러나 김민석의 탈당은 역풍을 불러왔다. 저 유명한 ‘희망돼지 모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핍박받는 대선후보 노무현의 선거자금을 국민모금으로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노란돼지저금통에 실제로 모인 건 4억에서 7억 정도였으나, ARS나 카드후원금까지 합치자면 72억원 정도였다. 그러나 선거 당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노무현 후보는 한국에서 최초로 국민들의 모금만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습니다”는 문성근의 유세는 과장이었다. 민주당이 선관위에 신고한 대선자금은 283억원이었는데,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대선 후 선대위원장이던 정대철이 불법 대선 자금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훗날 나온 합리적인 예측은 당시 대선자금이 500억에서 600억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 모금 비율은 대선자금의 10%는 넘고 20%는 안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 이렇게 생긴 희망돼지는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모금의 상징이었지만 나중엔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전체 대선자금에서의 지분과는 별도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정치자금 모금은 노무현 후보를 되살리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 12%까지 하락했던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을 찍고 다시 힘차게 올라와 18%까지 올라섰고, 결국 22~3% 가량에서 정몽준과 다시금 경합했다. 30%가 넘는 이회창과 함께 1강 2중 구도가 형성됐다. 시민모금이 없었다면 정몽준과의 단일화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희망돼지의 아이디어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유시민 펀드’라는 변형된 형태로 다시 드러난다.

개혁국민정당, 그 이후…

그러나 노무현 대선승리 후 민주당과 공동의 여당임을 자임했던 개혁당의 앞날은 밝지 못했다. 2003년 4월 민주당과 개혁당의 연합공천 후보로 의원에 당선된 유시민은 개혁당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통령을 위해 필요한 집권여당, ‘개혁신당’이 필요하다 역설했으며 이 착상이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이어진다. 개혁당은 창당 과정에서 통합논의를 벌였고 결국 당 해산 후 개별입당의 형태로 정리가 된다. 이 와중에 끝까지 남았던 사수파는 개혁당의 역사를 1년 여 더 끌고 가지만 정치적으로는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개혁당 사수파는 현재의 진보신당 잔류파보다도 더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선관위에 의해 등록취소된 후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나 개혁당에서 시작된 시민참여의 전통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애매한 수준의 타협적인 당원정책을 가지고 있었던 열린우리당에도 당원들은 흘러들어갔다. 유시민과 함께 들어간 그 당원들은 7천여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유시민을 따랐지만, 역설적으로는 유시민이 이들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 7천명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열린우리당마저 사라진 이후 유시민이 다시 국민참여당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국민참여당의 창당 주축 역시 열린우리당으로 흘러들어갔던 그 당원들일 거라 추정된다. 물론 국민참여당 창당 이후엔 노무현 서거 열풍에 맞물려 신규당원들이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통합진보당에서 보는 ‘국참계 당원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역사는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진보정당 당원들에게도, 심지어는 시민사회 세력에게도 각인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이들이 2002년 당시의 여러 활동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무현을 반등시켰던 그 유권자들의 성향을 온전히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위기에 처한 개혁후보를 되살리는 데 시민참여가 필요하다는 점과, 그 시민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모종의 조직화된 집단이 매개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유추해낼 수 있다. 이것이 진보정당의 진성당원들과는 다른 형태의 조직이었던, 개혁국민정당의 역사를 반추하면서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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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金榮澤) 2012-06-10 04:28:19
내가 일루미나티 김대중과 노무현을 짓밟고 올라선사람ㅇ다..........
김영택(金榮澤) 2012-06-10 04:25:21
나도 국참당 창당할때부터 당원인데 ...... 십쉬기야 나는 각인된사람.
최근에 유명해진사람.........물론 방송과기사에는 일절나오지 않는다....
현재도 나오지도 않는다 앞으로도 일절 나오지 않는다....
김영택(金榮澤) 2012-06-10 04:24:18
나도 국참당 창당할때부터 당원인데 ...... 십쉬기야 나는 각인된사람.
최근에 유명해진사람.........물론 방송과기사에는 일절나오지 않는다....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거다.....
김영택(金榮澤) 2012-06-10 04:22:11
나도 국참당 창당할때부터 당원인데 ...... 십쉬기야 나는 각인된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