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소에 마련된 마을 ‘이장급’ 예우
기자생활 가장 슬픈 취재는 독기를 품고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
덕수궁에 갔다. 기자질 8년, 그 무엇보다 애달픈 취재를 하기 위해.
서울광장 건너편 덕수궁 대한문 앞마당에 제공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 경찰의 지속적인 견제에도 불구, 조문행사 준비자들과 조문객들은 영정사진을 잘 모시기 위한 천막을 쳤다. 그러나 주황색의 천막은 세워진 지 10분도 채 못가 의경들에 의해 철거됐다.
마당에 모여있던 시민 조문객들의 분향은 예정시각보다 40분이나 늦어져 오후 4시40분경부터 어렵사리 진행될 수 있었다. 천막의 보호도 없이 영정사진을 쓸쓸히 받치고 있는 너비 2, 3미터 정도의 초라한 탁자, 그리고 밀짚모자를 쓰고 환하게 미소짓는 사진 속 고인의 모습.
한 여성 시민이 외쳤다. “동네 이장님 분향소도 아니고 정말 너무들 하네.”
밖에 있던 시민들이 들여보내달라고 항의하자 경찰은 더욱 단호하게 막았다. 비운의 대통령이 구슬프게 떠나가는 길조차 그들은 염치없고 치졸하게 배웅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즈막 가시는 길 조문객 분향까지 막아내고 있는 MB야. 무엇이 그렇게 무서운가”
시민들은 슬픔을 나누기에 앞서 분노의 눈물부터 흘려야만 했다.
한 중년 남성이 소리쳤다. “가시는 분한테 이러지 말고 가서 딴 사람이나 잡아!” 중년 여성도 외쳤다. “대통령 문상도 못하게 하는 나라. 이게 대한민국이냐?”
노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수구언론에 대한 원한을 표출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조문객들 표정을 사진으로 담던 나를 네댓 명이 에워싸고 기자증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중동 기자로 오인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을 빚어낸 언론의 책임이 막중함을 통감하며 나 스스로 느끼는 오회의 눈물을 꾸물꾸물 집어삼켜야만 했다.
“오늘 같은 날도 이런 식으로 (봉쇄)해야 하나.” 전경차로 가득찬 동아일보 사옥 옆을 지나던 어느 여성이 동행인에게 건넨 말이다.
취재를 마친 상태에서 이번처럼 찜찜했던 기억은 없다. 하늘은 갰으나 이 땅 위엔 먹구름과 악(惡)만이 존재했다.
덕수궁에서 종로1가로 돌아오는 길. 조선일보가 보였고 동아일보가 보였다. 그리고 편집국에 돌아와 창문 너머의 청와대를 봤다.
아침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매번 가까스로 삼켰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의 아픔을 진실로 함께 나누는 올바른 시민들이 목 놓아 우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참아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