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팬덤 사회와 엔딩 없는 백종원 논란
[culture critic] 냉소적 팬덤.... 백종원은 왜 끝없이 조롱 당하는가
[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인터넷 ‘밈’의 제왕이 돌아왔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는 올 연초부터 각종 논란을 겪은 후 지난 5월 방송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달부터 <남극의 셰프>와 <흑백요리사 2>로 미디어에 귀환한다. 반년 간의 공백기 동안에도 백종원은 만지면 데일 만큼 뜨거운 이름이었다. 인터넷에서는 그의 과거 행적이 매일 같이 ‘파묘’되며 조롱당해 왔다. 여론은 백종원의 복귀를 성토하는 한편 흥분하며 고대한다. 과거만 파도 씹을 거리가 넘치는데, 새로운 방송에 출연한다면 얼마나 많은 ‘떡밥’이 쏟아지겠는가. 2025년 대한민국 최고 히트 콘텐츠는 ‘백종원’일지도 모른다.
백종원 사태가 유별난 것은 끝없는 논란의 지속성과 아득한 몰락의 낙차에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백종원은 불과 일 년 전까지 여론의 성역에 봉헌돼 있었다. 십 년에 걸친 미디어 출연과 공익적 행보로 푸근하고 유능한 데다 자애로운 이미지를 쌓았다. 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셀럽 중 백종원만큼 안티가 없는 인물도 드물었다. 우리 시대의 성인군자가 ‘빽햄’ 사태를 통해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만인의 조롱을 받는 심판대로 굴러 떨어졌다. 인터넷에 퍼진 “나여 백종원!”이란 밈은 그 말을 스스로 뱉던 시기의 백종원과 현재의 백종원 사이 이미지의 낙차를 신랄하게 조소한다. 숭배받던 백종원과 심판받는 백종원. 둘은 팬덤문화가 발생한 시기가 지난 후 오늘날의 팬덤 행위, ‘포스트 팬덤 사회’의 징후를 품고 있다.
흔히들 백종원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비유한다. 그럴만하다. 셰프도 아닌 사람이 셰프들 음식을 심사하고, 폐점이 속출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을 운영하면서 남의 식당에 훈수를 두고 다녔으니 말이다. 본업을 대신해 미디어를 통해 쌓은 권위로 행세하고 다녔지만, 드디어 온 세상에 실체가 폭로됐다. 몇 차례 글을 쓰며 지적했듯, 여기엔 백종원의 책임이 크다. 검색 한 번만 해도 숱한 이미지 포장의 혐의와 사업상의 논란거리가 주르륵 화면에 뜬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백종원이 벌거벗은 왕이었다면 사람들은 동화 속 신하들처럼 진실을 보고도 말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말하지 ‘않은’ 걸까. 백종원의 과거는 어디에 숨어 있다 나타난 것이 아니다. 전부 미디어에 나와 보여줬던 행동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제야 문제 삼고 처음 본 것처럼 반응하는 걸까. 그토록 유명한 방송들에서 그토록 많은 ‘떡밥’을 뿌렸었는데 그 모두를 보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는 보려 하지 ‘않은’ 것들에 화살촉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냉소적 주체’란 개념을 통해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 작동 방식을 설명했다. 냉소적 주체는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즉,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알면서도 복종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지젝의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의 구속 아래서 작동하는 개념이지만, 여기선 그 발화 구조를 자발적 팬덤 행위를 읽어내는 도구로 빌려 쓰려한다. '그들은 그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그를 숭배한다.' 팬덤은 우상의 결함을 인지하면서도 그 인지를 유예하는 메커니즘대로 움직였다. 왜? 그 사실이 자신들의 욕망을 어루만지는 이득을 주었기 때문이다. '냉소적 팬덤'이란 우상의 허구성을 인지하면서도 그로부터 얻는 이득을 위해 숭배와 비난을 선택적으로 수행하는 존재다.
백종원이 전파하던 집밥 레시피는 실제로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었다. 골목식당에서 ‘빌런’들을 호통치던 모습은 사람들이 자영업 식당을 들리며 절어있던 염증을 시원하게 정화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미디어를 거치며 어느새 거대해져 버린 백종원이란 ‘위인’을 우러르며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어떤 대리만족을 통한 보상을 얻기 위해 숭배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 욕망의 지속적 충족을 위해 백종원이 결코 드물지 않게 드러낸 ‘쎄한’ 모습은 보지 않은 척한 것이 아닐까.
이 정황은 오늘날의 팬덤 행위가 실용적 목적과 일정한 정서적 거리두기를 통해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원래 스타는 사회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였다. 나의 결핍과 환상을 자극하는 스타를 만나게 되면 정서적 유착을 통해 사랑에 빠졌다. 팬덤 행위가 결과적으로 내 삶에 활력을 준다고 해도 그것을 얻기 위해 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유착 관계가 끈끈하기 때문에 설령 스타가 잘못을 저질러도 ‘탈덕’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제는 팬덤문화가 고도화되고 일상화됐다. 사람들은 팬 활동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내 삶의 정서적 요구와 욕구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팬 활동을 한다. 미디어 난립으로 유튜버에 인플루언서까지 유명인은 넘쳐난다. 나의 수요에 맞는 우상을 골라잡으면 된다. 여론을 둘러보면 요즘엔 코어한 수준의 팬덤이 그야말로 삽시간에 형성되는 걸 보고 놀랄 때가 있다. 미디어에 뉴페이스가 나타나자마자 팬덤이 생기고 그에게 자신을 투사하듯 예찬하고 방어하는 여론이 출현한다. 유명인 숭배가 일상이자 취미가 되었다고 할까.
반대로 팬덤문화와 함께 안티 팬덤문화도 발전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쉽게 숭배하는 만큼 누군가를 쉽게 미워한다. 유명인을 매 타작하고 끌어내리는 ‘심판’은 즉각적 쾌락과 힘의 도취감을 안겨준다. 숭배가 일상이 되었다면 ‘도파민’도 일상어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셈법이 실행된다. 우상을 숭배하는 즐거움보다 그를 파괴하며 얻는 즐거움이 더 크다면? 그럴 만한 명분과 근거가 손에 쥐어진다면? 그것을 위해 ‘파묘’가 필요하고, ‘밈’은 파괴를 놀이처럼 정당화한다. 백종원의 경우, ‘빽햄 사태’가 셈법이 반전될 결정적 트리거가 되었다. 만신전의 꼭대기에 모셔져 있던 위인이었으니 추락하는 낙차는 그 어떤 케이스보다 아찔한 속도감을 선사했다. 미디어에 무수히 출연했으니 채굴할 수 있는 ‘업보’도 무수히 널려있다. 백종원 사태가 엔딩 없이 반복되는 이유다. “나는 그를 매일 같이 비난할 이유는 없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여전히 그를 비난할 거야.”
이건 백종원을 옹호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일 년 가까이 특정인물이 끝없이 소환되며 웹 문화의 자족적 콘텐츠가 된 상황은 짝을 찾기 힘들다. 이런 상황 밑창에 무엇이 웅크려 있을지 더듬어 보았을 뿐이다. 백종원 개인에 한한 현상도 아니다. 유명인이 운명의 장난처럼 발을 헛디디고 한순간에 ‘나락’으로 가는 건 사회적 현상이 됐다. 그들 모두가 한때는 작은 백종원처럼 우상시되던 인물이다. 숭배와 비난은 한 몸에 붙어 있고, 사람들은 역할극을 수행하듯 숭배자와 징벌자를 오간다. 포스트 팬덤 사회는 팬덤 행위가 정서적 유착을 넘어 실용적 목적의식을 띠며, 냉소적 팬덤에 의해 숭배와 비난이 순환하는 상태다. 백종원 사태는 바로 이 새로운 사회상이 영사기가 멈추지 않은 채 상영되고 있는 거대한 극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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