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하지 못한 정부, 국부를 잃는다
자원 없는 나라의 부국 전략은 ‘예측력’에서 출발
[미디어스=권오석 칼럼] 대한민국은 석유도 천연가스도 희토류도 거의 없는 나라다. 그러나 이 부족한 자원 속에서도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디스플레이 같은 세계적 제조 강국으로 성장해왔다. 이는 자원의 힘이 아니라 사람과 기술, 그리고 예측력 있는 정책의 힘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우리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을 보면, 이 '예측력'이라는 국가의 보이지 않는 자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금값 13배, 그러나 놓친 국부의 기회
2003년, 한국광물자원공사(KORES)는 내부 보고서를 통해 “향후 금 가격의 대폭 상승 가능성”을 경고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정, 달러 약세, 원자재 가치 상승 등을 근거로 금을 ‘전략광종’으로 편입할 것을 제안했지만, 당시 관계 부처는 물가 상승 우려와 외환시장 불안 가능성을 이유로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20년 후 금값은 무려 13배나 뛰었다. 만약 당시 정부가 1조 원어치의 금을 비축했다면 지금 가치는 13조 원이 넘는다. 이 사례는 단순한 ‘투자 실패’가 아니다. 예측 데이터가 존재했음에도 정치적 계산과 단기 논리로 무시된, 구조적 정책 실패의 상징이다.
예측력의 부재가 초래한 연쇄 손실
한국의 자원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이 뒤집혔다. 해외 자원개발은 ‘과잉투자’라며 축소됐다가,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긴급 확보’로 바뀐다. 에너지 정책도 탈원전과 원전 확대 사이를 오가며 산업 현장의 혼란만 키운다. 희토류와 리튬, 니켈 같은 전략광물 비축은 미미하고, AI 반도체 원자재인 갈륨·게르마늄 같은 핵심소재도 중국 수출제한 한 번에 산업 공급망이 흔들린다. 이처럼 예측 부재와 정치적 간섭이 반복되면, 제조업의 경쟁력은 서서히 침식된다. 산업계는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정부는 매번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는다.
‘자원순환’은 새로운 광산이다
이제는 ‘새로운 자원 확보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 답은 땅속이 아니라 도시와 공장 속의 자원순환 시스템에 있다. 한국은 매년 1,500만 톤 이상의 산업폐기물과 전자폐기물을 배출하지만, 회수 가능한 희귀금속의 실제 회수율은 4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해외로 수출되거나 단순 폐기된다.
산업단지 내에 금속 회수·정제센터를 설치하고, AI 기반 자동분리 시스템을 도입하면 금·은·팔라듐 등 귀금속 자원의 국산화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폐배터리에서 리튬과 니켈을 재추출하고, 폐전자제품에서 희토류를 회수한다면 이는 곧 ‘도시 광산(Urban Mining)’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재활용 원료 사용 기업에 세제 혜택을 부여하고, 순환경제형 소재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지정해야 한다. 이러한 자원순환 산업은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원료 자립과 수입대체의 핵심 국가전략이다.
정권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구조
문제는 이러한 전략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는 점이다. 정책이 정치의 하위 도구로 전락하면, 국가의 예측력은 무너진다. 따라서 이제는 “정권이 아닌 국가가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 직속의 독립기구 형태로 ‘국가정책예측청(PFA, Policy Foresight Agency)’을 설치해, 에너지·자원·산업·기후 분야의 장기 시나리오를 통합 관리해야 한다.
또한 20년 단위의 ‘국가자원기본법’을 제정해, 정권이 교체돼도 산업·자원 전략이 자동으로 이어지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정책의 연속성이 곧 예측 가능성이며, 예측 가능성은 투자와 고용의 신뢰를 낳는다.
데이터와 기술이 새로운 나침반이 되어야
21세기의 자원정책은 통계가 아니라 데이터 예측과 인공지능 분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AI 기반 자원가격 예측시스템,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조기경보, 산업별 원료 비축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면, 정부의 결정을 “감(感)”이 아닌 “팩트(fact)”로 전환할 수 있다. 정책 결정 시 AI 예측 검증서를 의무화하고, 민간 전문가와 연구기관의 예측정보를 통합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책의 과학화’이며, 선진국형 행정의 출발점이다.
예측정책이 만드는 새로운 국부
정부가 예측력 있는 정책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막대하다. 자원비축 확충과 순환경제 산업화로 연간 5조 원의 수입대체 효과를 거둘 수 있고, 관련 일자리만 10만 개 이상 창출이 가능하다. 정책 실패로 낭비되는 불필요한 예산도 연간 2조 원 이상 절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자산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정부”는 곧 “투명하고 믿을 수 있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나라의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다. 그러나 '예측력'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원이다. 정책의 예측력은 국부와 직결된다. 2003년 금값 예측 무시 사례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닥칠 자원·기술·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다. 정권의 이해보다 국가의 미래를 우선하는 체계, 정치가 아닌 과학이 정책을 주도하는 시스템, 그리고 자원순환을 통한 원료 자립이 결합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예측 가능한 부국(富國)’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예측하지 못한 정부는 과거를 잃지만, 예측하는 정부는 미래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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