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시간이 차곡차곡

[주관적이고, 사적이고, 사소한 이야기] 가을바람에 실려온 밥 짓는 냄새

2025-10-13     김담이 작가

[미디어스=김담이 칼럼] 창문을 열기 딱 좋은 계절이다. 선선한 가을 아침 공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선선한 가을 공기만 들어오는 게 아니다. 바람을 타고 밥 짓는 냄새도 솔솔 들어온다. 밥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밥 냄새를 맡고 있으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나는 입이 짧은 어린이였다. 입도 짧은데 위와 장도 약했다. 조금만 많이 먹어도,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찬 음식을 먹어도 배가 아팠다. 할머니는 배가 아파 끙끙거리는 나를 보며 항상 말했다. ‘풀로 붙인 배.’

의미를 알려주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튼튼하지 못한 배라는 뜻이었다. 툭하면 붙인 곳이 떨어져 탈이 나는 배라는 의미였다. 탈이 나면 할머니는 언제나 손으로 배를 정성껏 문질러 주었다. ‘할머니 손이 약손이다’라고 말하며 배를 문질러 주면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아침이 되면 나는 다시 입 짧은 어린이가 되었다. 밥그릇의 밥은 내가 먹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았다. 깨작깨작 밥을 먹는다고 잔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잔소리하면서도 김은 내 앞에 놓아 주었다. 김만 있으면 밥을 잘 먹었다. 마른김을 가스렌즈에 살짝 구워 소금을 넣은 들기름을 붓에 묻혀 바르면 세상에서 이보다 고소한 음식은 없었다. 김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와 결혼을 시켜야 하나, 하며 아버지가 웃으며 농담할 정도였다.

살얼음이 셔벗처럼 내려앉은 동치미까지 항아리에서 꺼내오면 아침 식사 준비는 끝났다. 식탁에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으며 나누는 시간이 추억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주말이면 할머니가 좋아하는 칼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얇게 펴고 차곡차곡 접어 칼로 썰던 할머니의 손은 언제나 하얀 밀가루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호박이 듬뿍 들어간 칼국수를 입에 가득 물고 있으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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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창문을 열면 비슷한 냄새가 들어온다.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 김치 볶음 냄새, 밥 짓는 냄새가 엷게 퍼진다. 나는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면 다른 집의 식탁을 상상한다.

202호에서는 아침 도시락을 싸고 있을 것이고, 파란 지붕 집에서는 반찬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가족을 부르고 있을 것이다. 401호 집 아이는 밥을 남기고, 녹색 대문 집에서는 국을 떠주는 손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밥 짓는 냄새 속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누군가의 하루가 피어나고 있다. 이들 사이에 입 짧은 어린이였던 내가 있다.

식탁 위에 늘 비슷한 반찬이 놓여지듯 매번 하는 대화도 비슷했다.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일을 이야기하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일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나누는 일이었다.

식탁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할머니가 앉던 자리는 이제 비어 있고, 아버지가 웃던 자리는 조용하다. 그 자리마다 한 시절의 온도가 남아 있다. 식탁의 나무결에는 가족의 목소리와 숨결이 스며 있다. 숟가락이 닿던 자리에는 오랜 세월의 손끝이 닿아 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이제 나는 그 식탁에 앉지 않는다. 하지만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된장 냄새가 들어올 때마다 그 시간은 다시 살아난다. 그때의 냄새와 목소리는 내 안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끓고 있다.식탁은 사라졌지만, 그 위에 쌓인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밥 짓는 냄새가 나는 순간, 나는 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가족이 그들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식탁 위의 시간은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온 이야기이자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밥이 다 식어도, 그 냄새 속에 가족의 시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김담이,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2023년 12월 첫 번째 장편동화 『올해의 5학년』 출간.  2024년 11월, 소설집 『경수주의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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