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화는 무엇이 다른가

[culture critic] 세계 문화 속에 자리 잡은 한국의 문화적 도상

2025-09-13     윤광은

[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관해 두 차례 글을 썼다. 한 번은 포괄적 관점에서 흥행의 의미를 다뤘고, 지난주엔 영화 내부를 겨냥해 비판적 관점을 풀었다. (관련기사 ▷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소유권 포기한 K 컬처의 세계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감춘 케이팝의 상처) 공개된 지 석 달이 되어 가지만 이 영화의 괴력은 여전하다. 누적 시청 3억 뷰를 눈앞에 두고 있고, 'Golden'은 빌보드 핫100 1위를 질주 중이다. 다시 한번 논평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엔 역시 영화 내부를 경유하되, <케데헌>이 이룬 일을 긍정적으로 찾아보려 한다.

<케데헌>을 감싼 내용과 맥락을 살펴볼수록 이 영화가 이토록 흥행한 건 'K' 때문이란 확신이 든다. 텍스트만 보면 <케데헌>은 약점도 많고 낯익은 것의 집합체다. 예컨대 'Golden'의 메시지도 나 자신으로 당당히 살겠다는 <겨울왕국> 'Let It Go'의 변주처럼 느껴진다. 익숙한 것들이 '한국'이라는 ‘이세계’에 실리며 새로움을 획득했다.

그 많은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 영화와 <케데헌>의 차이는 뭘까. 새로움과 동시대성이다. 고전 동화에 바탕을 둔 디즈니 유니버스는 반복과 증식을 거치며 새로운 원천이 옅어졌고, <케데헌>은 디즈니 식 애니메이션 서사가 현대의 특정 국가에서 전개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제공)

이 영화의 연출에서 우수한 점이 있다면 첫째로 뮤지컬 연출이다. 이야기는 비약과 듬성듬성한 구멍을 껴안고 있지만 뮤지컬 장면만큼은 솜씨가 발휘돼 그 구멍을 채우고 감정선을 형성한다. 원래 뮤지컬은 애니메이션과 상성이 좋다. 뮤지컬은 불시에 진행되는 춤과 노래를 통해 일상의 공간이 축제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마술의 순간을 품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배우의 연기에 의지하는 전통적 뮤지컬과 달리 그래픽 효과를 통해 그러한 전환을 시각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

사자보이즈가 등장하며 'Soda Pop'이 길거리에서 연행될 때 둥근 무대가 솟아오르는 장면, 영화의 대미를 맡은 'What It Sounds Like'에서 헌트릭스가 무지개 빛 오로라에 휩싸여 날아오르는 장면이 그 예시다. 한국의 시가지, 공연장을 무대로 팝 스타일 사운드와 케이팝 군무가 연행되는 것은 기존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고풍스러움과 차별화된다. <케데헌>은 거기에 퇴마의 액션이 결부돼 있어 뮤지컬이 주는 감각과 볼거리가 다양한 것도 장점이다.

<케데헌>의 두 번째 장점은 문화적 도상(icon)의 선별과 운용이다. 알다시피 이 영화엔 한국을 나타내는 무수한 대상이 표현돼 있다. 연출의 목표 자체가 헌트릭스의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물을 알리고 전시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국밥과 김밥, 컵라면 같은 음식부터 남산타워, 한옥거리 등의 공간 배경, 한국의 간절기를 반영한 의복이 촘촘하게 진열 돼 있어 이국적인 세계가 빈틈없이 완성돼 있다. 과거를 넘나들며 전통적 지역색까지 덧칠 돼 있어 한국이란 문화권을 단 한 편의 영화에 압축해 놓았다.

거기에 한의원, 목욕탕, 무속신앙처럼 동양적 비의성이 장식돼 마치 서구를 위해 개최되는 새로운 오리엔탈리즘의 박람회처럼 느껴진다. 압권은 호작도를 재현한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다. 둘은 굿즈 사업을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일 만큼 개성 있고 사랑스럽게 그려졌는데, 전통 민화에서 이런 캐릭터를 발굴한 것은 한국 안에선 누구도 발휘하지 못한 상상력이다. <케데헌>은 한국적 도상의 세계화ㆍ상품화 가능성을 한계치까지 밀어붙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더피’와 ‘서씨’ (넷플릭스 제공)

물론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케데헌>이 전시하는 건 ‘K’의 표면이다. 그 아래 깔린 원리는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적인 것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해서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서양 동화와 기존 아시아 문화권의 도상을 대신하는 레퍼런스로서 'K'의 도상들이 글로벌 문화의 네트워크에 등재됐다. 싸이의 말춤이 흥행하고 케이팝이 글로벌 장르가 되는 등 몇 차례 계기를 거쳐 그 도상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케데헌>이 폭발력을 얻을 수 있었고, <케데헌>이 더 많은 한국의 도상을 퍼트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강남 스타일'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케데헌>으로 매듭을 지었다고 할까. <케데헌>을 한국에서 만들지 않았다거나 속편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이야기는 별로 의미가 없다. '닌자 거북이'와 <스타워즈>를 일본에서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닌자와 사무라이가 서구에서 인용되고 소비되는 사실이 변하지 않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케데헌>이 시리즈로 발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나온 한국의 도상들이 차후 세계 문화산업에서 얼마나, 어떻게 인용되느냐가 중요하다. 이게 바로 관련 주제를 통해 거듭해서 말해 온 K컬처의 ‘소유권 없는 세계화’다.

이것이 전례 없는 현상은 아니다. 냉정히 말하면 비서구의 문화적 도상이 서구에 수입돼 세계화된 사례는 적지 않다. 쿵푸와 차파오는 서구에서 일상화된 이미지고, 작년 넷플릭스에선 <쇼군>이 공개돼 에미상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오히려 한국 문화의 경우 다른 아시아 문화권에 비해 세계화의 후발주자라고 봐야 한다. 다만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더 신선하게 어필할 수 있었고, 여타 국가와 달리 동시대 미디어 산업을 무대로 둑이 터지듯 진행되고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제공)

여기서 하나의 운명을 예견해야 한다. K컬처, 특히 케이팝은 타 문화권의 재능과 인프라, 도상을 차용하는 혼종성을 통해 세계화 됐다. 때문에 문화적 전유 논란에 빈번히 오르내렸지만, 이제 타 문화를 전유하는 입장에서 '우리'의 문화가 전유되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한국 문화의 단편들이 왜곡 없이 전파되는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 손을 떠난 문화가 남의 손에 재창조되는 것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지의 문제다. 이미 떠들썩했던 <케데헌>이 K컬처가 맞느냐, 앞으론 우리 손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자는 논쟁은 그에 따른 초기의 성장통이라고 할까.

<케데헌>은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역사적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케데헌>이 한국을 온당하게 대표하는 텍스트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 문화 세계화의 질적 변화를 끌어내고 있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지 않다. 한국에서 만든 음악과 드라마가 소비되는 차원을 넘어, 한국에서 온 코드와 상징이 세계 문화의 구조와 상상력 속에 자리 잡았다. BTS도 <오징어 게임>도 해내지 못한 <케데헌>의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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