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정책, 성장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
창업자에게만 과도하게 전가되는 책임
[미디어스=진혜인 칼럼]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벤처투자가 원금 손실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는 '주주'로서의 투자라기보다는, 창업자를 대상으로 원금 보존장치를 여러 겹으로 설치한 '채권자'로서의 투자에 실질적으로는 더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동일한 회사의 주주임에도 불구하고 벤처투자자에게만 수차례 원금 회수의 기회를 부여하는 기형적인 리스크-리턴 상황을 초래한다.
특히 창업자인 대주주 개인에게 투자금의 회수 책임을 지우는 관행이 고착화되면서, 스타트업 창업은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개인 연대보증에 가까운 위험을 떠안는 일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민간의 관행으로 치부하기엔 그 여파가 크다. 위험 분담을 전제로 한 벤처투자 시스템이 창업자에게만 일방적으로 리스크를 떠넘기고 있다면, 이는 정책과 제도가 침묵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문제의 구조: 창업자를 채무자로 만드는 계약 조항들
많은 투자계약에서 아래와 같은 조항이 일반적으로 등장한다.
- 상장 실패 시 창업자 개인이 투자금을 상환해야 할 의무
- 벤처투자자의 청구에 따라 지분을 매입해야 할 의무
- 높은 고정수익률 또는 과도한 리픽싱 조항
- 원 투자금보다 과도하게 높은 위약벌 조항
- 회사 채무에 대한 연대보증을 통해 사실상 원리금을 회수하는 구조
이러한 조건은 형식상 투자계약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창업자 개인을 경제적 보증인으로 만드는 구조다. 이로 인해 실패 가능성을 감수하고 창업에 나서려는 인재들이 위축되고, 오히려 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자산가만이 창업에 나서는 구조가 고착화될 우려가 있다.
제도적 공백, 이제는 메워야 할 때
현재로서는 이런 조항을 제한하거나 판단할 명확한 법적 기준이 없다. 투자계약은 당사자 간 자율로 보기 때문에 공정성이나 창업자 보호 여부에 대한 공적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창업자는 벤처투자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교섭력을 갖고 있지 않다. 이처럼 사실상 강제된 계약에 의한 구조적 불균형은, 자본이 아닌 제도가 바로잡아야 할 문제다.
정책 제안
1. 창업자 개인에 대한 연대보증·투자금 상환 강제 조항 금지
「벤처투자촉진법」 또는 「상법」에 창업자의 개인적 보증 또는 상환의무를 유발하는 조항은 무효로 본다는 명시적 규정이 필요하다. 이는 기업 실패 시 창업자 개인을 파산에 이르게 하는 비정상적 구조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2. 투자계약에 대한 공정거래적 검토제도 도입
일정 규모 이상의 스타트업 투자계약에 대해 불공정 거래 조항 검토를 신청할 수 있는 제도를 신설할 수 있다. 창업자나 기관이 이를 요청하면, 민간 자율기구 또는 중소기업 옴부즈만 차원의 검토를 거쳐 시정권고를 할 수 있다.
3. 표준 투자계약서 및 권고안 마련
미국이나 영국 등 일부 선진국은 창업자 친화적인 단순투자계약(SAFE) 모델을 보급하며 초기 단계 창업자 보호에 적극적이다. 한국도 법무부·중기부 등에서 공정한 표준계약서 모델을 제정하고, 그 사용을 유도하는 정책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4. 스타트업 전담 분쟁조정기구 설립
스타트업 투자계약에 관한 분쟁은 비공개, 신속, 전문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별도의 전담 조정센터 또는 중재기구를 마련하고, 창업자가 비용 부담 없이 분쟁 해결을 요청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모태펀드와 정책적 변화
모태펀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벤처투자조합은 상당 부분 연대보증 조항을 삭제하고 있다. 여전히 일부 벤처캐피탈은 연대보증을 포함한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신보나 기보와 같은 정책금융기관은 연대보증을 요구하지 않지만, 고의나 목적 외 사용(예: 개인 부동산 구입 등)과 같은 조건부 연대보증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벤처캐피탈 투자계약서에서 명시적인 연대보증이 아니더라도 주요 매출청산, 위약벌과 같은 독소조항이 많은 경우가 있다. 이들은 경영실패에 대해 지나치게 징벌적인 조치를 취하며, 이는 창업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고 있다.
실적 압박과 창업자의 지속 가능성
VC 및 심사역들의 실적 압박으로 인해, 실제로 망한 회사도 폐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청산이 벤처캐피탈의 동의사항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일부 창업자들은 ‘좀비’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이로 인해 창업자는 재정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사업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창업자의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구조는 결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성장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 창업자의 지속 가능성
제도는 혁신보다 한 걸음 뒤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벤처투자 구조는 창업자의 실패조차 허용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혁신을 이끌 창업자들이 스스로 책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시장을 떠난다면 벤처생태계는 자본만 남은 껍데기가 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벤처 투자 건수 집행과 거래대금 상승이 아니라, 위험을 공정하게 분담하는 제도적 기반이다. 이제는 창업자가 사업을 하지 못하게 막는 제도가 무엇인지, 그 제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논의해야 할 때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