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말하는 자의 책임
[culture critic] 산불과 죽음에 관한 말들
[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얼마 전 재난과 죽음을 언급하는 두 마디의 말이 세상을 떠돌았다. 하나는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안동 지역의 산불을 언급하는 말이었다. 그는 더본코리아 주주 총회 말미에 “저는 성격 상 (주주총회가 아니라) 지금 산불 난 데 가서 밥 해주고 이걸 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한겨레신문 이정국 기자의 기사다. 그는 ‘뉴진스 둘러싼 기이한 ‘과열 보도’…김새론 떠난 지 얼마 됐다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쓰며 “김새론의 죽음이 던진 사회의 충격과, 그 메시지를 잘 헤아려야 한다. 지금의 뉴진스를 둘러싼 과열된 여론과 언론보도는 기이하다. 숨을 고를 때다”라고 글을 맺었다.
두 말은 말을 하는 주체와 말을 받는 대상이 다르지만 구조와 맥락은 닮아있다. 비극을 돕겠다고 선언하거나 비극의 침통함을 환기시키고, 그 메시지는 특정한 주체와 명시적·암묵적으로 연결된다. 그 주체인 백종원과 뉴진스는 논란의 격랑에 휩싸인 상태다.
백종원 대표는 실제로 안동에 가서 이재민과 소방 인력을 위한 무료 급식소를 차렸다.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조리와 배식을 했다고 한다. 훌륭한 일이다. 액면 그대로 봤을 때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전까지 그가 처한 위기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일 사람도 없을 것 같다. 나는 그가 저 말을 주주총회에서 한 상황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재민을 돕고 싶었다면 곧장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주들에게 입장을 밝혀야 하고 매스컴이 집중되는 장소에서 공언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할인을 통한 상술 논란, 농지법 위반, 원산지 표시법 위반과 형사 입건 등으로 집중포화를 맞는 백종원 자신에 관한 진실이 타고난 “성격 상”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인물로 표백되는 발화 구조다.
지나치게 꼬아서 바라보는 걸까? 지난 시간 동안 더본코리아를 키운 동력 중 하나는 공익을 지향하는 백종원의 행보였다. 그것이 실은 내실이 없었고 사익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지금 제기되는 의혹이다. 모양새만 보면, 이번에도 똑같은 처세가 반복되고 있다. 만약 백종원의 말과 행동이 악화된 여론을 누그러트리는 효과를 낸다면, 이 땅의 산림과 주민들에게 닥친 악재가 그에게는 호재가 된 셈이다.
한편, 뉴진스 기사를 쓴 이정국 기자는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뉴진스를 지지하는 기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 의도를 들여다볼 방법은 없고 기자는 논조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중요한 건 주장의 정당함과 짜임새다. 그는 법원의 전속 계약 효력 가처분 인용 이후 뉴진스에 쏠리는 비난이 과열됐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기사는 고인이 된 김새론을 거명하는 마지막 두 문단에서 도덕적이고 감상적인, 그러나 공격적인 반문을 문맥 속에 품은 호소로 도약한다.
고인이 여론의 비난을 받아 낸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그가 눈을 감은 상황의 한 배경을 이루는 것도 사실이다. 그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이 있겠지만, 고인의 죽음 자체는 조심스럽게 언급되어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고 관련된 논란이 현재 진행형이다. 그 자체로서 온전히 추모되고 주목되어야 하는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개인의 죽음은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다. 그 앞에서 말하는 자는 침묵의 무게를 자각해야 한다. 그 무게를 느껴 보며 고인을 존중하고 자신 역시 반성의 대상에 포함하는 것이 ‘침묵의 윤리’다.
자신이 변호하는 산 사람을 위해 고인을 거명하는 것이 윤리적 태도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저 마지막 문단의 호소는 사실상 그런 뜻처럼 들린다. “당신은 뉴진스도 김새론처럼 만들 셈인가?” 타인의 죽음이 울린 정서적 울림을 가져와 죄의식을 일으키며 도덕적 논거를 확보하려는 호소다. 죽음에서 교훈을 얻는 것과 죽음을 사용하는 것 사이엔 지울 수 없는 경계가 가로놓여 있다.
저 유명한 칸트의 정언명령은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객체가 아닌 주체로 접근되어야 하는 사건과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구분하는 책임이 과오로 논란이 된 당사자와 세상의 논란을 전하는 언론에 있다. 그 책임이 지켜지지 않을 때, 다른 이들의 선행과 추모의 목적까지 의심받는 냉소의 전염이 일어난다. 타인과 비극은 그렇게 수단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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