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와 휠체어는 남태령을 넘는다

[기고] 이 사랑을 마다하는가

2024-12-25     안담 작가

[미디어스=안담 칼럼] 집회나 시위에 갈 때는 되도록 차고 무딘 마음을 준비하는 편이다. 수적 열세인 현장에 갈 때에는 주눅 들거나 겁먹지 않기 위해서이고, 수적 우세인 현장에 갈 때에는 강력한 일체감이나 숭고에 휩쓸려 섬세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개인적으로는 2016년 박근혜 탄핵 집회를 기점으로 그렇게 마음먹었다.

뚜렷한 기준 없이 냉소나 체념에 젖길 선호하는 패배주의자의 태도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태도는 주로 ‘지는 싸움’에 익숙한 사회적 약자들이 갖추는 방어구의 일종이다. 이보다는 편이 적을 다음 싸움에서 지나치게 동요하지 않도록 마음을 평탄하게 고르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가령 ‘대통령을 탄핵하라’는 구호 아래 단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거나 ‘페미니스트도 광장의 주인’이라거나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시대’를 만들자는 구호 아래 단결할 수 있는 사람의 수. 숫자들을 비교하다 절망하는 일을 앞으로도 숱하게 반복해야 하리란 예감 속에서, 전략적으로 무덤덤해지길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기뻐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 선포되던 12월 14일 오후 5시, 200만의 사람들이 그랬듯 나도 국민이 승리했다는 함성으로 가득 찬 여의도 한복판에 있었다. 반사적인 기쁨도, 습관적인 슬픔도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어정쩡한 울상을 지었던 이들에게 뒤늦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그날의 광장이 진정 모두의 광장이었다면, 기쁨이 충만하다고 느끼는 대신 슬픔이 모자란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자리 또한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환호하고 노래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나 또한 목을 갈아 넣어 <다시 만난 세계>를 열창했다.

그러나 가사가 없는 노래의 공백마다 외로움이 파고들었다. ‘이기는 싸움’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의기양양함이 사무치게 낯설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함께 혜화역에 서서 이토록 어깨를 으쓱해 본 일이 있던가? 용주골과 미아리 성매매집결지에서 내쫓기고 있는 성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가슴을 이만큼이나 펴본 일이 있던가? 고양감도 자신감도 가지기 어려운 휑뎅그렁한 싸움터. 의사당대로 가로폭에도 못 미칠 길이의 스크럼을 짜고서 경찰 및 용역과 대치했던 기억들. 두려움과 피로를 씻어내지 못한 얼굴이 서로의 약점이 될까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사람들. 아직 이기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노라면, 국민이 승리했다는 구호만큼은 외칠 수 없었다. 잠시나마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을 향해 한목소리로 “안녕”을 외칠 수 있게 해준 케이팝의 포괄적인 노랫말이 고맙기도 야속하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면 질문들이 올 차례였다. ‘우리’가 노래한 슬픔은 같은 슬픔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란 사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2020년 4.15 총선을 앞두고, 노원구을에 출마했던 우원식 후보자는 TV토론회를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분명하게 동성애에 반대하며,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4년 후, 탄핵안 가결을 알리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음성이 여의도 하늘에서 일렁이는 무지개 깃발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지난 12월 4일, ‘윤석열 대통령 사퇴 촉구 탄핵 추진 비상시국대회’가 열리던 국회 앞에서, 장애인의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던 전장연 박경석 대표의 발언은 비상시국대회 참여자들에 의해 중지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박경석 대표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행사하는 데 와서 그렇게 하면 그게 호소력이 있겠어요? 더 미움받지” 발언을 이어가는 박경석 대표를 다시 한번 막아선 것 역시 시민들의 야유와 박수였다. 때와 장소를 가리고 순서를 지키라는,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모멸적인 언사가 그에게 돌아왔다. 

박경석의 제안에는 특권의식에 매몰된 윤석열 같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이 유독한 정치 생태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지혜가 담겨 있었다. 현재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불리는 사람은 그의 지혜를 마다했다. 여야와 좌우를 ‘막론’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요청에 똑같이 응답하고도, 소수자들은 정권교체라는 우선순위를 방해하고 국론의 순수성을 더럽힌다는 혐의를 쓴 채 매번 ‘국민’이나 ‘우리’를 표시하는 금 밖으로 밀려났다.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여성의, 장애인의, 트랜스젠더의, 성노동자의, 지방민의, 이주민의, 노동자의 희망과 사랑은 그 금 밖에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다. 누구에게도 건네지 못한, 달궈진 쇠공 같은 사랑을 오래 품어온 사람의 마음에는 구멍이 뚫린다. 그 구멍의 장점이 있다면, 투쟁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과 좌절을 다소간 흘려보내는 통로로 기능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는 충분히 기뻐하거나 충분히 슬퍼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힐난이 늘 잔인하다고 느껴왔다. 뭘 더 어떻게 느끼라는 말인가? 더 느끼면 죽어버릴 것 같은 사람들에게? 

윤석열 대통령 구속 등을 촉구하며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이 21일 서울 서초구 남태령에서 경찰 버스에 가로막혀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지난 21일 남태령 고개에서, 나는 ‘지는 싸움’에 익숙하면서도 다시 한번 희망을 느끼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농민들의 용기를 보았다. 트랙터를 끌고 서울에 도착한 전봉준투쟁단을 경찰들이 막아섰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남태령으로 모였다.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느라 때론 빼고 때론 더했을 자신의 여러 이름을 나열했다. 동짓날의 낮과 밤과 아침이 다 지나고서야 남태령은 열렸다. 농민 신체의 연장이기도 할 트랙터들이 다시 움직였다. 농민들은 기쁨과 행복을, 연대 의식과 동지애를 가감 없이 표현했다. 위두환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의 말을 옮긴다.

농민들만 있을 때 경찰들이 폭력적으로 했었는데, 우리 20대 시민들이 다가왔을 때는 정말 큰 힘이 되어서, 코끝이 찡할 정도의 감동이 되었다, 농민들만 있었으면 다 연행되거나 더 무지한 탄압이 있었을 텐데, 20대 여성들이 지켜줘서 정말 감동했습니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생경했을까. 여자인 게 벼슬이다, 젊은 게 벼슬이다, 아니 늙은 게 벼슬이다, 누군가의 약자성을 이권과 동등한 교환가치를 지니는 코인처럼 취급하는 말들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서일까. 지금도 누군가는 농민, 노인, 여성, 청년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누가 피해자의 자리를 선점하느냐를 두고 가장 빈약한 차원의 싸움을 하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남태령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약자성을 비교하고 줄 세우지 않았다. 대신 내가 상대적으로 누리는 벼슬과 권력을 나누겠다고 결정했다. SNS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 서울에 살고 서울을 안다는 특권, 관심과 주목이라는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 잠재력과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는 나이라는 특권, 누군가 상처 내길 두려워하는 피부를 가졌다는 특권. 자신의 특권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체하기 위해 결집한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살이 새로 돋기라도 하는 듯 고통스러웠다. 쌀을 자주 씻기에 그랬던 것 같다. 옮겨 담을 때 조금만 정신을 팔아도 벼룩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어 숨어버리는 쌀알들, 작고 약하고 단단하며 건조하고 개별적인 쌀알들 사이에 손을 넣고 있노라면 이따금 믿을 수가 없었기에. 나중에는 이것들이 뭉쳐진다는 사실을, 부드럽고 끈적하고 달디단 무엇으로 엉긴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있기에.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한강진역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 농민 행진 보장 촉구 시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트랙터를 보며 환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혐오에 기반한 정치는 모두가 자신이 더 낮은 곳에 있는 약자라고 악다구니를 쓰게 만든다. 여성이 성노동자와 트랜스젠더를 미워하도록 만들고, 양파를 기르는 사람이 쌀 기르는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고, 피로에 찌든 노동자가 장애인을 미워하게 만든다. 약자성과 피해자성을 종으로 줄 세워 번호표를 발급한다면, 이 줄의 맨 앞에 있을 자격을 두고 약자들을 분열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라면, ‘나중에’를 외치는 일은 폭력이 아니라 질서를 수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교통질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를 대며 농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경찰 권력에 항의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그래서 중요하다. 남태령은 삶 위에 삶이 있고 삶 밑에 삶이 있다는 억압적인 논리에 대항하여 횡으로 재편된 사람들을 보여주었다. 농민과 시민은 이렇게 묻는 듯했다. 이제 누가 먼저일까? 이 모든 사람이 먼저이다. 모두가 한꺼번에 먼저이다. 남태령은 농민과 소수자가 함께 넘은 고개이면서, 차별적인 구조에 기생하는 정치가 넘을 수 없었던 고개이다.

그러니 정치권에 묻고 싶다. 이 사랑을 마다하는가? 억압 받아본 사람들의 사랑을, 다만 자신이기 위해서 가족과 친구와 맞서야 했던 사람들의 용기를, 언 땅과 젖은 땅을 긁으며 울어본 사람들의 투지를, 때아닌 눈과 비를 견디며 가까스로 모인 한 그릇의 소복한 쌀밥과 같은 사랑을 마다하는가? 모두가 이기는 장소에서마저 처절하게 외로워야 했을 깃발들에 서린 분노와, 그 장소까지 이동하기도 어려운 누군가의 우울,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사회 속에 내 존재의 형태가 녹아내린다고 느껴온 사람들의 슬픔, 이 끈적하고 검은 기름과 같은 마음들에 불을 붙인다면, 그 불이 얼마나 환하게 탈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안담 작가. 무늬글방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 ⟪친구의 표정⟫, ⟪소녀는 따로 자란다⟫, ⟪엄살원⟫(공저)을 썼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