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주연을 뛰어넘는 존재감에 빛났던 조연 천지호가 죽음을 맞았다. 그것도 역시나 허무하게. 추노는 참 많은 인물들을 죽여왔지만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허술하고 한편으로는 무성의하게도 비친다. 청국 무사들의 난입으로 태하가 구출되고, 도망치던 태하가 검을 던져 대길을 살려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혼자서 형장에 잠입한 천지호의 발상은 허술한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천지호라는 인물의 비중을 충분히 감안해 감동적인 장면 하나와 명대사 하나는 남기고 갔으니 그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대한 위안은 겨우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천지호의 죽음은 저자 막나가는 왈짜에, 야차 같은 추노꾼의 최후라고는 볼 수 없는 절정의 미학을 담고 있다.

죽은 이의 발가락에 입김을 부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는 것보다 더 부질없는 짓인데도, 그 장면은 업복이 복수마저도 포기하게 할 정도로 숭고했고 또 처절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지만 천지호는 죽으면서 대길의 목숨을 구하고 또 추노의 주제를 남기고 갔다.

"세상을 겪어 봐야 아냐? 당해 봐야 아는 게야"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엽전 두 닙을 입에 넣어 저승노자를 챙기는 천지호는 고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없이 보여주었다. 사실 천지호의 삶에 대해서 그다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입에 엽전을 넣는 본능적 행동은 오래 전부터 짐작하고, 스스로 준비해온 최후의 동작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보다도 스스로 엽전을 입 안에 넣는 모습이 더 아프게 남았다.

그런 천지호의 죽음은 대길에게도 언제 닥쳐도 당연한 듯하면서도, 막상 당해서는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대길의 마음 속 천지호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개차반인 그러나 언니였던 것이다. 오죽하면 때 꼬질한 시신의 발가락을 입에 물고 하염없이 입김을 불겠는가.

한편 처형장에서부터 대길을 쫓은 업복은 어느 샌가 총을 챙겨와 대길의 뒤를 겨냥하나 천지호의 죽음에 통곡하는 모습에 그만 복수를 단념하고 만다. 햄릿에 대한 오마쥬를 느끼는 장면인데, 산을 내려온 업복이가 초복이에게 뜬금없는 말을 한다. "짐승도 울 때는 총을 쏘는 법이 아니라는. 그냥 다음번에 죽이면 된다는 그런 말 아니겠나" 햄릿의 대사와 큰 차이가 없다. 그 말끝에 다른 집에 팔려갔다 도망 온 반짝이를 발견한다.

인물 반반한 여종이 팔려가 당하는 일은 대강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도망온 어린 딸을 거둘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반짝이의 어미와 아비가 하는 말이 가슴을 찢을 듯이 아프다. 지금까지 도망쳤던 업복이를 야단치던 그 노비이다. 그러나 들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어느 년인들 그런 꼴 안당하고 사는 줄 알어? 다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이렇게 산다고 생각혀" "엄마도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래도 엄마도 살고 있잖아" " 먹고 자고 하다 보면은 죽을 때 되는 게 사람살이야"

앞서 천지호가 말했듯이 이들의 삶은 겪는 세상이 아니라 당하는 세상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천지호와 노비 부부가 나눠서 그들이 사는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겪는 세상은 언젠가 최장군이 말했듯이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겠거니"하는 것이라면 당하는 세상의 삶은 "먹고 자고 하다보면 죽을 때"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뭐 저런 의식도 없는 노비를 봤나하고 하고 답답했던 인물인데 비로소 할 말을 해주었다.

겪는 세상과 당하는 세상이 혼재된 것은 비단 추노의 시대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반짝이 아비가 저 말을 하기 전까지는 당하고도 세상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말을 하게 되면 그 말 때문에 더 아프고, 아무리 아파도 달라질 것이 없는 처지가 또 서러울 따름인 탓이다. 이 처절한 노비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린 혹시 당하면서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재미로 쫓아간 추노 이제는 의미로 정리해야

초반의 뜨거웠던 몸에 대한 관심과 비난 속에 어느덧 추노는 종반에 다다랐다. 재미로 사람을 유인했던 추노는 이제 의미를 통해서 그간의 여정을 정리해야 할 지점에 도달했다. 추노 천성일 작가의 인터뷰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곽정환 감독의 전작 한성별곡이 논문이라면 추노는 만화라는 것이다. 이성보다는 가슴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가슴을 움직이기 전에 눈부터 홀리는 것이 너무 컸고, 눈에 거슬리는 것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작가의 말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나마 이것만이라도 어디냐는 생각도 하게 된다. 또 그렇게 하지 않고는 주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한성별곡이나 이준기의 히어로처럼 매니아 드라마가 될 공산도 큰 탓이다. 지극히 대중적인 재미 속에서 무거운 주제를 녹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공정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동안의 무리수와 실수들은 숙제로 남겨둘 수도 있을 듯 하다.

한편 그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짝귀가 드디어 등장했다. 허나 천지호의 부재를 대신할 그에 대한 큰 기대는 걸지 않게 된다. 다만 짝귀를 대하는 동안 과묵한 최장군이 드디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코믹연기를 한번 했다는 것이 잔재미를 주었다. 최장군보다 두 살 많은 짝귀가 언니 소리 듣고 싶어 하는데, 자네, 자네하며 친구 대하듯 하던 최장군이 땅에 파묻으라는 말에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다급하게 '언니'하는 무뚝뚝한 개그가 배꼽을 잡게 했다. 그러나 대길과의 회상신은 짝귀를 설명하기에 부족했으며, 완전 코믹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각한 것도 아니어서 기다렸던 것에 비하면 싱거운 등장이었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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