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시청자의 바람대로 최장군과 왕손이는 살아났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은 아주 오랫동안 회자되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 소리이다. 정작 재난 영화들을 본다면, 종말 즈음에 할 것이라고는 외마디 비명밖에는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한가한 날들이 지속된다면 가끔은 한번씩 생각해봄직한 것이 최후의 순간이기도 하다. 두 주간 살았느니 죽었느니 설왕설래가 극심했던 최장군과 왕손이는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추노의 주인공 대길과 태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다만 죽음을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들은 마치 항상 죽음을 준비해온 사람들처럼 멋진 대사들을 남겼다. 칼솜씨만큼이나 말솜씨 또한 일품이 아닐 수 없다. 고문에 지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드라마의 절대원칙대로 철웅의 고문에도 비아냥거리던 대길은 마침내 최장군과 왕손이를 해한 범인을 알게 되자 철웅에게 결연한 눈빛으로 말을 토해낸다.

"기억해라. 네 놈이 죽는 날 내가 거기 서있을테니까" 죽이겠다느니 원수를 갚겠다는 말보다는 대단히 은유적이고 한편으로는 시적이기도 하나 그 에둘러 표현한 말이 만일 당사자라면 간담이 얼어붙을 정도로 지독한 원한을 담고 있다. 이에 질세라 태하 역시 대길 못지 않는 명대사로 철웅을 호되게 강박한다. 그것도 그동안 대길의 전매특허였던 극한의 고통 연기에 당당히 맞설 만한 힘으로 고문받으며 토해낸다.

"인두 식는다. 시작해라" 철웅이 태하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런 태도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벗이고자 하는 마음과 추억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출신과 혼인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다가 영원히 2인자라는 굴레가 너무도 지독했던 탓에 살인귀로 변한 지금, 태하의 조금은 무너진 모습을 보고 싶은데 끝끝내 기개를 꺾지 않으니 철웅도 그 나름 죽을 맛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미 장혁의 명대사가 있었기에 사실 중복되는 것이지만, 그 때문에 김이 새버릴 대사였지만 대길보다 더 심한 뜨거운 인두찜질을 비명 없이 견뎌내는 영웅적 태도로 간신히 살려낼 수 있었다. 대길이 고통과 분노의 감동을 폭발시켰다면 태하는 그것을 삭히고 안으로 다지는 연기였다는 구분이 가능하다.

이미 대길에 의해서도 냉소적 반응을 받았던 태하 일행의 거사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철웅에게 "남아가 한 인생을 살아감에 보다 나은 세상을 바라는 열망을 어찌 사사로운 욕심으로 몰아 가는가"라고 한다. 그리나 어쩌면 추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철웅도 한마디 받아친다. "아름다운 말로 포장하지 말거라. 그 열망이 욕망으로 변해가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거늘" 한다.

이 정도면 말의 상다리가 휠 정도다. 듣고 나면 별 것 아니겠지만 고문장에서 오간 몇 마디의 대사에는 당시 혹은 어느 시대건 관통하는 시대 상황이 담겨져 있다. 단순히 양반을 저격하던 수준에서 홍길동처럼 직접 관직을 가진 사대부의 집을 털고, 노비문서를 태우는 등 본격적인 반란을 일으킨 노비당의 진화와도 연관을 갖고 있다. 그들의 불행한 결말은 결국 누군가의 욕망에 도구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추노의 두 여인 혜원과 설화는 비슷한 분량으로 등장했는데, 혜원이 기지를 살려 숙식도 해결하고 기찰을 피하는 등의 활약을 보인 반면 설화는 고작해야 대사라고는 국반 한 그릇 더 달라는 것뿐이었다. 사실 그것은 하나마나한 대사였지만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설화의 정처 없는 여정을 그리는 수묵화 같은 그림은 혜원과 마찬가지로 잠시 화면을 멈춰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때 설화는 한 가지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지금까지 설화가 민요 맛을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온 것을 알지만 그중에서 가장 못 부른 것으로 경남지역 민요인 진주난봉가이다. 가사 내용만 놓고 본다면 시집살이의 고됨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이지만 이 노래는 저항의 의미도 담고 있다. 죽음으로 몰아내는 현실의 질곡만큼 저항의 동기가 되는 것은 없다. 이 노래의 끝에는 며느리가 목을 매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인정 없는 시어미 밑에 고초를 겪다가 믿었던 서방마저 난봉질에 빠진 것을 보고 목을 맨 며느리의 자살은 비관도 크겠지만 처절한 저항도 담겨져 있다. 그런 노래를 설화가 천진난만하게 부른다. 게다가 설화의 진주난봉가는 자신을 버리고 간 대길에 대한 원망이라고 볼 수 있는데 묘하게도 대길이 형장에 매달릴 때에 그 노래가 겹친다. 대길이 교수대에 매달리는 중요한 순간에 설화의 신세타령이 배경으로 깔리는 데에는 분명 감독의 의도가 있을 것이다.

노래 속 며느리의 처지와 죽음이 대단히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설화는 천방지축인 본래의 모습처럼 스타카토까지 넣어가며 발랄하게 부른다. 이 걸맞지 않는 두 요소의 결합이 정확히 무엇을 노린 것인지 감독 본인이 아닌 이상 다 알 수는 없다. 알지도 못하면서 좋다는 말이 어폐가 있지만, 은유나 상징이라는 것 자체가 말로 성립되지 않는 불립문자의 공감이 기본이 된다. 마치 색불이공 공불이색처럼.

그것은 바로 추노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처연한 서정성에 대한 추억을 일깨워주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사건의 전개보다 관심이 가고 또 반가운 것은 설화의 진주난봉가였다. 추노 초반에 보여주었던 억새밭에서의 해금연주만큼의 집중은 아니었지만 17회 설화의 민요 한 자락은 간만에 영상미도 살리고 복선의 채용에서도 차분함을 회복한 즐거운 여백이였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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