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부 작 <추노>가 이제 반을 돌아섰으니 아직 먼 길을 가야만 합니다. 매번 변죽만 울릴 뿐 결코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은 채 시계추는 24부 작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쫓는 게 무엇인지도 모호해지고 좁아지는 시야에서 <추노>가 그리는 세상은 사랑에 빠진 남자들의 울부짖음만 남아갑니다.

오합지졸들의 난망한 혁명가

1. 혁명인가 반항인가?

저잣거리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 대길과 언년이 해후를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부터가 어리석은 기대였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돌아가기만 반복하는 그들의 막막한 어긋남은 대길에게 불신을 강요하고 잘못된 적개심과 복수심만 키워낼 뿐입니다.

대길 패거리들을 제압하고 송태하를 쫒는 그들을 이용하는 전법을 사용하는 황철웅을 칭찬해야겠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허망한 여정에 별 수 없이 동참해야만 하는 시청자들은 뭔가요? 매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오합지졸들의 혁명가를 들어야만 하는 시청자들은 허망함에 지칠 뿐 입니다.

야망만 가득한 권력욕의 화신인 조선비는 좌상 이경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경식이 자신의 사위인 황철웅을 이용해 자신의 야욕을 달성해 가듯, 조선비는 송태하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욕을 탐하려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나라가 아닌 누구의 나라만이 있다'는 것은 변화를 수단으로만 사용한 채 권력만 품고 있는 현 정치권의 모습과 다름없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누구의 나라'에 국민이 들어서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민초의 혁명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역사 속에서 그들의 혁명은 말뿐인 혁명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허망한 혁명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이야기하려 고민하는 송태하와 부하들이 그나마 값져 보이는 것은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2. 오합지졸 노비들의 반란

임무를 하달 받은 업복이 일행은 어설픈 총 사용법을 익히고 실전에 투입됩니다. 새가슴보다 작은 노비패거리들을 이끌고 양반 사냥을 해야 하는 업복이로서는 예고된 숫자의 두 배가 넘는 이들의 등장에 난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보와는 달리 선비가 아닌 선비 복장으로 변복한 무장들이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문제의 노비들을 잡기 위해 투입된 그들은 총격을 하는 업복이 일행을 쫓기 시작합니다. 총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쁜 그들에게서 그 어떤 명분도 찾을 수 없는 오합지졸들의 치기만이 보였을 뿐입니다. 칼을 피해 총을 버리고 달아나는 그들에게서 노비의 반란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오합지졸의 모임은 어느새 양반 사냥은 양반집이나 털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반란에는 전술전략은 전무한 채 막연한 목표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막연함은 한 꺼풀만 들춰 내면 모든 패가 다 보이는 허술함의 극치임을 업복이 패거리들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반사냥'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농락당하는 노비들의 뻔한 몰살을 목도하기 위해 제작진들은 사전 준비 작업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거둬가기 시작한 <추노>에서 '노비의 반란'은 찻잔 속의 태풍도 아닌, 흔들리는 조그마한 파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추노>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양반에서 사랑때문에 추노꾼이 된 대길과 조선 최고 무장에서 대의를 위해 노비가 된 송태하의 언년일 둘러 싼 사랑 놀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3. 사랑에 눈 먼 남자들을 위한 드라마

<추노>는 대길과 송태하를 혁명을 위한 인물들이 아닌 사랑에 굶주리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걸 수밖에 없는 인물로 한정하고 각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예고편이지만 최장군과 왕손이의 '실종 혹은 죽음'을 송태하의 짓으로 위장하고, 질투와 복수에 눈 먼 대길은 송태하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며 살의에 불타는 장면에서 더 이상 그럴 듯한 명분을 찾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저 사랑에 목멘 남자들의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만의 싸움에 역사가 덮씌워진 형태가 된다면 남은 10회 분량은 지리멸렬한 추노질만 남을 듯합니다. 역사가 이야기하듯 그들의 혁명은 실패한 반란일 뿐인 상황에서 결과를 위한 결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은 헛헛하게만 다가올 뿐 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를 차용한 <추노>에서 처음부터 그들이 성공할 것이란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합지졸들의 치기나 주변만 맴돌다 사랑에 눈 먼 싸움이 중심이 될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탐욕에 눈먼 오 포교에 의해, 궁지에 몰린 천지호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좌표를 잃은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로섬 게임을 하듯, 혹은 마지막 생존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등장인물들을 죽음으로 몰아 제거해 나가는 <추노>는, 혁명과 복수를 다짐하는 이들 먼저 죽어가고 언년이를 사이에 둔 대길과 송태하의 사랑싸움만 남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희망이 짝귀가 관리하고 있는 도망 노비들의 마을일까요? 그곳이 작가나 감독이 대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일까요? 현재까지의 흐름을 보면 그곳만이 그들의 판타지를 현실로 바꿀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일 듯합니다.

안빈낙도가 나쁘지는 않겠지만 다수의 고통을 무시한 채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겠다는 것은, 혁명이 아닌 자기만족에 기반한 현실 회피에 불과할 뿐입니다. 곽정환 PD의 전작인 <한성별곡>의 확장판이면서도 전작을 능가하지 못한 채 때깔만 좋은 블록버스터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습니다.

두 배가 넘는 분량 속에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한성별곡>의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추노>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아직도 모호합니다. 많은 부분 전작을 이식해 온 <추노>에서 결국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이룰 수 없는 사랑'만은 아니겠지요?

대단한 그 무엇을 원하지는 않지만 기획 의도에서 밝혔던 그들의 가치를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기를 기대 할 뿐입니다. 결코 바뀌지 않는 세상. 민초의 난은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기 위한 드라마는 아니겠지요.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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