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노운 걸>의 주인공 제니(아델 하에넬 분)에게 잘못이 있다면, 진료 시간이 끝난 이후 병원문을 두드린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그뿐이다. 하지만 소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현재 일하고 있는 병원보다 근로조건이 훨씬 좋은 병원을 마다하고, 이름도 사인도 알 수 없는 소녀의 행적을 찾기 위해 일종의 고행을 택한다.

밤늦게 병원문을 두드린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되기 전까지 제니는 현재 임시로 일하고 있는 병원으로부터의 탈출을 강력히 꿈꾸고 있었다. 벨기에 리에주의 빈민가에 위치한 이 병원의 근로 환경은 모든 면에서 열악하다. 리에주에도 24시간 응급실을 갖춘 종합병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제니를 찾는 환자들은 큰 병원에 가길 거부한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지만, 불법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종합병원으로 가길 거부하는 환자도 상당수다. 그래서 제니는 원내진료를 하는 틈틈이 병원 방문이 어려운 환자를 위한 왕진도 다녀야한다.

진료 시간이 끝난 늦은 밤에도 응급환자라는 이유로 왕진을 나가야하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간호사도 없이 제니 혼자 병원을 운영해야 한다. 아무리 환자 진료를 최우선으로 여겨야 하는 의사라고 해도, 그녀만을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제니는 자연스레 다른 병원으로 탈출을 꿈꾸고, 그녀의 소원대로 근무 환경이 좋은 종합병원으로 이직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정체불명 소녀의 죽음 이후, 제니는 이직을 포기하고 그녀가 임시로 근무하고 있던 병원에 눌러앉게 되었다. 이직을 포기한 제니의 삶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환자들이 부르면 바로 달려가야 하는 생활은 그대로인데, 죽은 소녀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마을 주민들에게 오해를 사고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제니가 원한 것은 이름 없이 죽어간 소녀의 진짜 이름과 죽은 이유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출신 불법체류자였던 소녀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소녀의 죽음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진실을 말하기 꺼려한다. 경찰도 소녀의 정체와 사인을 밝히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오직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는 그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가진 제 뿐이다.

<언노운 걸>에서 제니가 원하는 것은 딱 두 가지이다. 소녀의 이름과 사인. 소녀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니는 진실을 알기 위해 스스로 고행을 택한다. 소녀가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꼭 그럴 필요까지 있냐는 질문에, 제니는 온몸으로 “그렇다”를 외친다. 소녀의 죽음과 관계된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게 된 제니는 그들을 다그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다. 나도 당신들과 똑같이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진실을 말하고 죄의식에서 벗어나자고 그들을 설득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늘 그렇듯, <언노운 걸>에는 현재 유럽 사회를 둘러싼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동시에 등장한다. 서민들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실질적인 의료복지 환경이 구축되어 있지 않는 환경에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여자 의사는 매춘을 하다가 사고를 당한 불법체류자 소녀의 사망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제니의 환자들은 하나같이 사회의 변두리로 밀린 가난한 사람들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불법체류자들은 벨기에 국민들이 받는 기본적인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제니가 큰 병원으로 가라고 권유해도 그들은 통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 나 벨기에에서 쫓겨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소녀의 이름이 쉽게 밝혀지지 않는 것도, 소녀의 죽음이 지역 사회 내에서 쉬쉬 되는 것도 법적으로 벨기에 국적이 아니었던 소녀의 신분과 무관하지 않다.

제니가 흑인 소녀의 죽음에 유독 죄책감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도입부에 제니는 발작하는 어린 환자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인턴 줄리앙을 두고 “의사란 무릇 감정을 누르고 강해져야 한다”고 다그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진료하지 않았던 흑인 소녀의 죽음 앞에서는 감정을 누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크지만, 같은 여성으로 사회적 약자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모른 척 했다는, 시민으로서 죄책감도 섞어 보인다.

소녀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죽은 소녀에게 이름을 찾아주고 가족을 찾아주어야겠다는 제니의 막연한 의지 또한 구체화되어 간다. 소녀의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니는 감정을 추스르며 스스로에게 내린 과업을 끝까지 완수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소녀의 이름을 찾아주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제니의 삶은 소녀를 알기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찾는 환자들을 혼자 진료해야하는 격무에 시달리고, 그렇게 해서 제니에게 주어지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소녀의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좋은 직장의 이직까지 포기한 제니의 선택은 안타깝고 어리석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실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제니의 선택은 옳았고, 그녀 덕분에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제니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힐 수 있었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선택이 모여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바로잡으려는 자세,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