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정책 선거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실제 돌아가는 현실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유권자들은 여전히 정책보다는 후보에 대한 이미지나 감성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는데 훨씬 익숙하다. TV토론에서 쟁점이 된 정책을 보고, 신문과 방송의 공약 검증 기사를 보고 지지 후보를 바꿨다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나는 서민이고 그래서 서민을 위한 공약을 가장 잘 제시한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명제가 성립돼야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후보자들도 정책과 공약보다는 다른 '장치'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고 상대를 흠집내는 폭로 정치에 더 열을 올리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언론도 이런 현실 때문에 정책 보도가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한다. 정작 정책보도를 해도 '관심'이 없다는 것인데 아무리 그래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논하기엔 언론의 책임이 무겁다. 언론이 각 후보의 정책을 꾸준히 검증하고 이슈와 아젠더를 계속 형성해내야 국민들의 눈과 귀를 정책과 자질 문제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나서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 KBS 정치외교팀 이강덕 기자 ⓒ서정은

KBS가 지난 9일부터 'KBS 유권자 의제 15'를 선정해 정책보도에 나선 것은 그래서 주목을 받을만하다. 그동안 일자리창출, 공직자 부정부패 해소, 사교육비 경감 대책, 집값 안정 대책, 북한 핵문제 해결방안, 사회 양극화 대책, 중소기업 정책, 환경문제 해결방안 등이 다뤄졌다. 각 후보들이 내세우는 3대 공약을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도 시작했는데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공약, 정동영 후보의 개성공단, 권영길 후보의 비정규직 대책, 이인제 후보의 금산분리 정책, 심대평 후보의 행정수도 문제, 이회창 후보의 개헌 주장, 문국현 후보의 8% 경제성장 등이 주제로 다뤄졌다.

KBS는 이번 유권자 의제를 비롯해 후보 정책과 자질 검증을 위해 최근 정치외교팀 기자 7명으로 정책검증팀을 구성했다. 지난 19일 KBS 신관 보도본부 사무실에서 이강덕 정책검증팀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KBS에서 대선 후보의 정책과 자질을 검증하기 위해 태스크포스팀을 꾸린 것은 처음이라고 들었다. 어떤 취지인가.

"선거보도는 잘못하면 공방 중심으로 흐르거나 단편적인 동정만 전하기 쉽다. 그래서 대선을 정책 대결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고 후보자의 정책을 충분히 국민들에게 소개하고 공약을 비교해 검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정책 선거의 비중을 높여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여보자는 것이 '정책검증팀'의 취지이고 목표다. 그리고 각 분야의 교수 11명, 그리고 시민단체에서 참여연대와 경실련이 참여해 13명의 정책검증자문단을 구성했다. 정기적으로 전체회의를 하고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로 의견을 듣는다."

- '유권자 의제 15'는 어떻게 선정했나.

"국민들이 후보들에게 가장 따져묻고 싶은 현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국민들의 질문이 경제 분야에만 치중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자문단에서 예비의제 30개를 분야별로 선정한 다음 이 가운데 선택하게 했다. 대선의 경우 후보자의 국정 비전을 종합적으로 따져야하기 때문에 소주제까지 범위를 넓힌 것이다. 그 결과 정치 행정 외교 국방 통일 분야에서 5개, 경제 산업 민생 분야에서 5개, 교육 문화 복지 환경 분야에서 5개로 유권자 의제가 분포됐다."

- 유권자 의제 검증 보도는 어떻게 준비했나.

"우선 유권자 의제 15개를 중심으로 후보쪽에 자료를 요청했다. 또 내부적으로는 후보 선출 이후에 후보들이 했던 발언을 쭉 정리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보충 취재를 했고 되도록 닥쳐서 후보 인터뷰를 하는 방식은 배제하려고 했다. 물론 유권자 의제와 관련해 후보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발표되지 않은 부분은 별도 취재가 필요했지만 이번 기획만을 위해 따로 인터뷰를 하지는 않았다. 내용이 보태어지거나 준비된 답변이 나오면 제대로 된 검증이 안된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후보들이 답변을 멋있게 꾸미려고 하지 않겠나. 그래서 평소에 후보들이 자연스럽게 발표한 발언과 정책을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했다.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에 대해서도 국민 여론조사를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지만 자문단 논의 결과 대중추수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정책에 대해 좋다, 나쁘다 식의 평가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경제성장률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수치가 높을 수록 좋다고 답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이템별로 선호도 조사를 하지 않는 대신 객관적인 분석과 자문단 평가로 리포트를 구성했다."

- 정책검증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다. 오히려 정책과 공약에 대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니 후보쪽에서도 자세가 달라지더라. 보여주기식, 때우기식, 설렁설렁은 안되겠구나라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갈수록 자료도 충실하게 보내오고 있다. 선대위 실무자들 뿐만 아니라 후보자 본인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약과 정책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래도 정책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높아지면 국민들도 정책과 공약을 생각해보려는 태도와 인식 변화가 생길 것이다. 또 그래야 후보자도 공약과 정책 발표를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줘야 언론의 지적을 받지 않고 국민에게도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 이번 KBS의 정책검증 보도를 자평한다면.

"보도본부 차원에서 메인뉴스 시간을 충분히 배려해 지원하고 있다. 유권자 의제의 경우도 15개로 넓혔더니 주요 현안을 다 챙길 수 있고, 후보자들이 직접 선정한 중요 공약을 통해서도 부족한 부분이 채워졌다. 대부분의 현안과 관심사를 심층취재를 통해 보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른바 유력 후보 외에 소수 후보의 주요 공약과 입장에 대해서도 배려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실제로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 유력 후보와 차별없이 문국현 심대평 이인제 권영길 후보까지 그들이 내세운 공약이 모두 다뤄지고 있다."

▲ KBS 정치외교팀 이강덕 기자 ⓒ서정은

- 후보들의 공약을 비교 평가하다보면 불만이나 항의가 들어오지는 않나. "보도에 있어서 법적으로 소수 후보를 어떻게 배려해야한다는 규정은 없다. 그저 양식에 따라 언론사가 판단을 해서 뉴스로 다루면 되는 것인데 선거에 뛰어든 후보의 입장에서는 불만을 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후보의 동정을 다 똑같이 보도해달라던가, '언제부터 그 사람이 1등이었냐'고 항의하는 부분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반면 정책이나 공약에 있어서는 보도를 통한 배려가 이뤄지고 있어 반응이 나쁘지 않다. 자신들의 정책을 예상보다 충실하게 다뤄준다는 호의적 반응도 많다.

게다가 주요 후보의 공약을 검증할 때도 첫번째 단계에서는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스스로 주장하는 강점을 소개하고, 두번째 단계에서 타 후보의 반론과 단점을 싣고, 세번째에서 이를 객관화시켜 총평을 한다. 후보 입장에서는 강점도 소개되고, 다른 후보 공약을 분석할 때는 반론을 펼 수도 있으니 리포트 구성 면에서 불만은 없는 것 같다."

- 방송뉴스의 물리적 한계에 대한 고민은 없나. 3~4분의 리포트로 후보자의 공약을 충분히 검증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방송에서 정책과 공약을 모두 다루긴 힘들다. 그래서 핵심을 빼내는 것이 중요하다. 중언부언 이것저것 다 알릴 수는 없고 핵심을 뽑아서 정해진 시간에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내야 한다. 한쪽으로 몰아갈 수도 없고 일방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중립성과 공평성까지 감안해야 한다. 그래서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핵심 사항을 알기 쉽게 해설하고, 공평하고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책검증팀 구성 자체가 연조있는 기자들을 중심으로 각 분야에 일가견있는 선수들로 구성한 것도 그런 이유다. 보도본부의 각 팀마다 해당 분야를 나눠서 진행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데스크가 모두 다르다보면 일관성을 해칠 수 있어 정치외교팀으로 일원화했다."

-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고 하는데 기자들의 전문성, 사전 준비 등에서 만족한다는 뜻인가.

"앞서 설명했듯이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외부 자문단이 있다. 또 자문단이 추천하는 각 분야별 전문가 의견도 충분히 듣고 있다. 그래서 공약을 평가하고 리포트를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기자들이 전문성을 갖고 그 분야를 다루는 것도 장점은 있겠지만 기자는 어차피 양식과 상식에 따라 사안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전달하는 것이 기본 역할 아닌가. 그 기본에 충실하려고 한다."

- KBS와 MBC가 언론사 여론조사 지지율 10%를 기준으로 '3자 후보토론'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주요 후보들로 포커스가 좁혀지면 주제마다 밀도있게 다룰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주요 후보들이 나오는 토론은 의미가 있다. 물론 기회와 형평성 차원에서 여러명이 하는 토론도 마련해 이원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솔직히 7명이 모두 나오면 한두마디 할 수 밖에 없고 겉핥기가 된다. 한번씩 다양하게 기회를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요 후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깊이있게 다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네티즌들의 반응도 그렇고 언론사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

"여론조사의 근원적인 문제를 지적하면 할말이 없다. 여론조사에 대한 일반론적인 문제제기로 다양한 방식과 논의를 깔아뭉개는 것은 곤란하다. 밑도 끝도 없이 지지율 5% 이하의 후보가 어느날 갑자기 20~30%로 뛸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숨어있는 지지율이 어느날 갑자기 나오는 것도 아닐테고 말이다. KBS도 정기적으로 패널조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지율 추이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 사건이나 위장취업 등의 보도가 공방으로만 흐른다는 지적에 대해선.

"선거 때 정치보도를 하는 것은 참 민감하고 매번 내부 의견도 나뉘어진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처음 제기된 이슈는 일단 보도를 해야한다고 본다. 당일에 모든 팩트를 확인하고 판가름 내기는 어렵지만 나중에 폭발력 있는 뉴스로 바뀔 가능성이 있으니 다루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쪽 반론을 다뤄야하다보니 공방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것인데 단순히 그렇게만 볼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팩트의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 치고받는 것만 되풀이해 보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되도록 첫 문제제기는 보도하되 계속 공방만 재연하는 보도는 지양하자는 내부 의견이 많다. 공방을 되풀이하지 말고 현장 취재를 가미해보자는 건데 솔직히 접근이 쉽지 않다. 표피적인 팩트 추가는 있을 수 있어도 결정적인 진위 여부는 확인이 안될 때가 많아서다. 위장취업 문제는 이명박 후보가 인정을 해서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혔지만 BBK 의혹처럼 취재 대상이 부정적으로 나오고 답변을 거부해버리면 시간만 가고 진전이 안되는 애로사항이 있다. 이것이 고민이다. 새로운 팩트에 접근하려고 해도 취재원이 회피하면 뾰족한 방법이 없다."

- 정치보도에서 이런 부분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건가.

"공적 영역은 정보공개가 이뤄져야 하는데 우리는 제도적 틀이 완벽하지 않아 문제다. 미국만 해도 공직자 관련 정보는 샅샅이 오픈하고 사적인 개인 영역은 철저히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니 애로사항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해도 그런 점에서 어렵다."

- 앞으로 후보 등록이 이뤄지면 공약들이 더 구체화될텐데 앞으로 계획은.

"정책검증과 자질검증을 두 축으로 2차 검증을 시작할 예정이다. 후보등록 시점을 계기로 세부적인 공약이 발표되면 메니페스토식 분석 기법 등을 활용하고, 현재 진행하는 유권제 의제와 후보자가 내세운 3대 공약 외에도 발굴사항 있거나 심층 이슈가 있을 때, 또 주요한 계기 때마다 후보 자질검증도 병행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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