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이 결국 현실이 됨으로써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전과는 달라진 원리로 운영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정권 약 4년은 비극을 통해 교훈을 얻는 일의 반복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주의’에 대한 복고적 향수로부터 성립됐다는 점을 상기하면 결국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는 것은 박정희주의와 결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언론 등이 정리한 박정희주의의 핵심을 꼽자면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정하고 나머지 것들을 이에 종속시킨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 주도의 수출 중심 경제 정책을 추진한 게 대표적이다. 수출 증대를 통한 국가적 부의 축적에 한국 사회의 모든 사회적 가치의 존재 의의를 종속시켰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독재가 가능했고 대다수 국민의 인권은 말살되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이 경제적 효율성의 추구에 필수불가결이었던 기업인들에게 관대했다는 건 이제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다. 최근에는 전경련의 역사에서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부정축재처리명단을 발표해 기업인 13명을 구속했으나 일본에 있던 이병철 삼성 회장이 급거 귀국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면담을 진행한 일이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인들이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기업인들은 벌금을 내는 대신 공장을 짓고 주식을 헌납하기로 했다. 이때 기업인들이 사회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만든 단체가 최근 해체 논란에 휘말려 있는 전경련의 전신이다. 이 전경련이 중요한 시기마다 재계와 정치권의 통로를 만들고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한 보수단체 지원에 나섰다는 의혹은 이제 거의 사실로 보인다.

이외에도 이른바 삼분폭리 의혹이나 오늘날 삼성과 CJ 불화의 먼 원인이 된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은 박정희 정권이 정경유착을 용인하는 걸 넘어서 적극적으로 추진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 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1972년 이른바 8·3조치는 박정희 정권이 효율성 증대를 위해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를 사실상 설계하였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오일 쇼크로 인한 위기와 부채의존도가 80%에 달하는 부실 경영으로 대기업들이 위기에 빠지자 정권이 사실상 기업의 사채를 동결하고 금융기관이 기업 구제에 나서도록 해 결과적으로 물가상승 압력의 고통을 서민에게 전가한 전대미문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는 오늘날까지도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관행을 형성해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삼성이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를 일방적으로 지원한 것은 이 유구한 정경유착의 역사로 본다면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유하자면 주인공만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모녀로 바뀌었을 뿐 같은 시나리오의 연극이 같은 무대에서 계속 돼왔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박정희주의와의 결별은 바로 이 대목의 악습을 끊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 할 걸로 보인다. 당장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에게 뇌물죄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가 여전히 논란이라는 점이 그렇다. 13일 진행된 최순실 씨의 뇌물 혐의에 대한 첫 재판을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쟁점이 어떻게 형성돼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13일 오전 국정농단 사태로 법정에 선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최순실 씨는 두 개의 재판에 출석했다. 앞서의 재판과 다른 하나는 삼성 등 대기업들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을 강제로 거둔 혐의다. 이에 대해 최순실 씨 측 변호인은 “검찰과 특검이 완전히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죄를 적용해 이중 기소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검찰은 최순실 씨의 혐의를 직권남용 및 강요로 보고 특검은 뇌물수수로 보았다는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최순실 씨의 혐의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삼성은 뇌물공여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특검은 최순실 씨 측의 이런 논리에 반론을 제기했다. 삼성의 정유라 지원 문제와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강요 문제는 별개의 범죄인데다가 검찰이 공소장 변경을 검토하고 있으므로 이중기소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강요 혐의를 다룬 재판에서 공소장을 변경할 의사가 있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검찰은 “뇌물 혐의 재판을 지켜보고 다음 주 중 입장을 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를 보면 뇌물 혐의를 주 혐의로 두고 강요를 예비 혐의로 구성해 재판부가 두 재판을 병합 심리할 가능성을 점치는 목소리도 나오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논리가 이 문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씨 등에 대한 뇌물 혐의 등은 탄핵 사유가 아닌 것으로 서술돼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의 논리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면 강요냐 뇌물이냐의 갈림길에서 강요 쪽으로 재판부의 판단이 쏠릴 가능성이 커진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의 논의 과정을 보면 꼭 그렇게만 볼 것인지는 의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를 구성할 때 뇌물죄 등을 근거로 하지 않은 것은 사건의 실체를 놓고 결론을 내렸다기 보다는 판단을 유보한 것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는 해석이다. 실제 동아일보 등의 보도에 의하면 헌법재판관 중 일부가 뇌물죄 언급을 반대하며 근거로 내세운 것은 이 문제에 대한 1심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성급하게 결론일 내릴 경우 오히려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는 거다.

이런 논리라면 최순실 씨 관련 재판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사실이 뇌물죄에 대한 반대 논리로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핑퐁게임’이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는 최순실 씨 관련 재판을 이유로 뇌물죄를 말하지 않고, 재판부는 또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을 토대로 뇌물 혐의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불합리한 논리를 사법부가 반복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 일각의 지적이다.

법 논리를 따지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겠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삼성의 행위는 부정적 의미로 정경유착의 대표적 사례로 각인될만한 것임엔 분명하다. 하물며 박정희주의와 결별하자고 말하는 시점이다. 만일 이 대목에서 삼성이 부활한다면 대통령을 탄핵까지 했는데 나라가 바뀌지 않는다는 국민적 절망감과 상실감은 배가될 것이다. 이 재판이 어떻게 되느냐에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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